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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Jan 17. 2023

미련을 미련스럽게 미련하다

한 번씩 아이 방 벽을 볼 때마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한숨이 절로 난다. 어쩌다 한 번씩 눈에 띄면 떼고 싶은 충동이 막 올라온다. 그 자리에 없었다면 벽이 훨씬 깔끔해질 것 같다.


사건의 발단(?) 2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아이에게 독서 습관을 길러주고 싶은 마음에 인터넷으로 독서스티커 판을 검색했고 그중 적당해 보이는 하나를 골라 프린터로 출력해서 지금의 벽에 붙였다. 그리고 딸에게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스티커 한 개씩을 붙이 50개를 다 붙이면 바라는 보상을 해주겠다고 유혹했다.


그즈음에 아이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게임을 다운로드하고 싶어 했다. 나는 50번째 스티커를 붙이는 날 원하는 게임을 다운로드하여 주기로 약속하고, 스티커 판 맨 밑줄에 게임이라고 크게 썼다. 처음 아이는 책을 읽을 때마다 의욕적으로 스티커를 붙여갔다. 스티커가 불어날수록 아이의 독서 습관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나는 거기에 더해서 매일 한 시간씩(이라고 하고 사실은 25분 독서+5분 휴식을 두 번 반복했다) 책 읽는 미션을 주었다. 물론 이런저런 핑계로 오늘은 좀 빼달라고 졸라대는 날도 (꽤) 있었지만, 대부분 날에 아이는 꼬박꼬박 책을 읽었다.


그런데 부모의 눈에 아름다운 습관이 딸에게 자리할수록  은 스티커를 붙이는 일에 무관심해져 갔다. 보다 못한 내가 스티커는 왜 안 붙이느냐고 물었더니 딸은 “그럼 엄마가 붙여주던가.”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는 단호히 그건 엄마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아이가 읽은 책이 50권이 훌쩍 넘었지만, 스티커는 중간에서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집에 놀러 온 조카가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걸 본 딸이 왜 다들 자기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는데 못하는 거냐고 울먹이며 말했을 때 스티커 얘기로 미약한 방어전을 펼치다가 백기를 들었다. 그날 이후 딸은 자신의 휴대전화로도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딸에게는 이미 나의 핸드폰에 다운로드하여 놓은 3개의 게임과 닌텐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살다 보면 1년이란 시간은 타임머신을 탄 듯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청소하다가 문득 혼자서 멈춘 시간의 벽에 사는 독서스티커 판을 발견했다. 나는 이제 없어도 괜찮겠지 싶어 그 자리에서 종이를 떼어내 버렸다. 그렇게 그 일은 적어도 몇 달 동안 기억에서 사라졌다.


별 탈 없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저녁, 아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무슨 일 있는가 싶어 방으로 갔더니 짜증 섞인 얼굴로 딸이 물었다. “엄마, 내가 책 읽을 때마다 스티커 붙이 종이 어디 갔어?” 나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아 버렸다고 말했다. 아이는 씩씩거리며 당장 다시 붙여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나는 어떻게 일을 그따위로 처리했냐고 혼내는 상사 앞에 선 부하직원처럼 당황해서 알았다고 답했다.


다음날 직장에서 독서스티커 판을 출력해서 집에 가지고 왔다. 스티커 판이 벽에 아이는 전에 스티커 몇 개까지 붙어있었는지를 물었고 나는 대충 30개라고 말했다. 아이는 30개의 스티커 손으로 일일이 붙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다.  이후 또 6개월이 지났 스티커의 개수 여전히 30개 유지하고 있다. 아이는 단지 스티커 붙이기를 완성하지 못해서 미련이 남았던 것뿐이다. 


미련이란 무엇일까.


미련이란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다. 현실에서는 이미 내 곁을 떠난 대상을 마음속으로는 차마 보내지 못하고 계속 매달고 있다. 대상은 사람이나 상황이 될 수도 있고, 물건 또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처음 좋아하는 감정으로 시작된 어린 새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이라는 마음의 나무로 점점 자란 난다. 미련은 사랑 나무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감정의 가지 중 하나다. 나무가 더 튼튼하게 자라라면 가지치기가 필요하듯 사랑의 대상이 떠난 이후 돋아난 미련이란 곁가지를 정성스럽게 가지치기한다면 우리는 더 큰 사랑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미련의 가지치기를 서둘러 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갔음에가지치기를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은 계속 과거 속에 시선이 머문 채 자신의 처지를 비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실재적 대상이 아닌 과거라는 비실재적 대상에만 집중하니 마음이 공허하다. 이미 관계가 끝난 대상이 마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던 중요한 수단처럼 생각되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사실 과거 대상을 그리워하기보다 당시 좋았던 감정에 속박당한 것뿐이다. 그래서 설령 그 대상을 다시 가졌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감정이 해소 뿐 그때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미련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 구멍 뚫린 감정이다.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는 스티커 판을 벽에 붙여 놓고 다시 방치하는 마음처럼, 미 떠난 과거의 인연 다시 가진다고 해도 소유욕의 해소가 주는 기쁨은 곧 허무하게 사라진다. 미련은 미련일 뿐, 미련을 미련스럽게 미련하지 말자.


아. 어떻게 하면 스티커 판을 소리소문 없이 떼어낼까 고민하던 나는 이거야말로 내가 가진 미련임을 깨닫고 더 이상 스티커 판에 대한 관심을 끄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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