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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Jan 13. 2023

먼지가 뭉쳐질 때까지.

작가이자 가수 이적의 어머니로도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은 과외 한 번 시키지 않고 아들 셋을 서울대에 보낸 것이 알려져 숱한 엄마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여성학자나 자녀 교육 멘토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아는 현인으로 기억한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를 그렇게 기억하는 건 바로 아들인 이적이 한 방송에서 그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언급한 먼지에 관한 일화에서 기인하였다. 하루는 이적이 지저분한 집을 보고 엄마에게 청소 좀 하자고 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먼지에게 시간을 줘라."


살림하랴. 일하랴. 공부하랴. 세 아들 육아까지 책임졌던 그녀에게 청소는 우선순위 대상이 아니었으리라. 이는 청소같이 사소한 일에 너무 목매지 말고 지금 신경 써야 할 중요한 일에 더 집중하자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녀에게 비견할 바는 아니지만 딸 하나 키우며 주 6일 일터로 가는 나 역시 청소를 자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함께 살며 육아를 도와주는 엄마에게 한 번씩 너는 70이 넘은 엄마를 언제까지 부릴 거냐. 집안의 먼지 때문에 귀신 나오겠다. 제발 청소 좀 하고 살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산다.


사십 평생 그런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온 내 귀는 옛날 중국영화 속 주인공이 혹독하게 무술을 연마한 것처럼 굳게 단련되어 있다. 그리고 TV를 통해 접수했던 그녀의 먼지 철학은 지금까지도 내게 가장 핵심적인 청소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 아침 책을 읽으려고 딸아이 방으로 들어온 나는 문득 문이 있는 쪽 구석에서 만수산 드렁칡처럼 서로 얽히고설켜진 채 웅크리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색 형체를 발견했다. 순간 거미인 줄 착각하고 흠칫 놀라서 몇 발짝 뒷걸음질 쳤다가 다시 천천히 다가가 정체를 확인하니 그것은 서로 뭉쳐진 먼지와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먼지 뭉치를 손으로 집어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먼지란 어느 날 갑자기 내 방구석에 몰래 침입한 도둑이 아니다. 미세한 먼지 입자는 먼저 공기 중에 느긋하게 부유하다가 우아한 몸짓으로 천천히 바닥으로 하강한다. 그리고 인간의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작은 바람에 휩쓸려 다니다가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있는 방구석에 도착하며 긴 여정을 마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들이 하나의 조직을 이루게 되면 그제야 나는 확연하게 드러난 먼지를 실체가 있는 존재로 눈치채게 된다.


그런데 먼지가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필요한 요소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시간이다. 비단 먼지만이 아니다. 무슨 일이든 구체적인 성과가 보일 때까지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선비처럼 느릿느릿 나풀거리며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먼지를 보며 나는 문득 먼지의 존재감을 만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참 신기하게도 내게는 종종 끌어당김의 법칙이 적용되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 세상이 관련 힌트를 보내 준다. 아침에 먼지의 시간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는데 그날 저녁 한 친구가 카톡으로 배우 이정재가 한 재단에서 수여하는 한국 이미지상 중 하나를 받으며 밝힌 소감에 대한 기사를 카톡으로 공유해 주었다.


“인생에 한 방은 없습니다. 얇은 종이 한 장에 꽉 채워진 글이 모여 성경이나 불경이 되듯, 작은 부분들이 켜켜이 쌓여야 큰 운과 기회도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화려해 보이는 배우로서의 성공 이면에는 무수히 쌓아 올린 노력이 숨어있었음을 소감을 통해 고백했다. 목적을 향한 방향만 잘 잡으면 노력만큼 정직한 것도 없다. 그러나 노력이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려면 무엇보다 노력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작은 시도가 쌓여서 산이 되리라 믿고 진득하게 기다려야 한다.


무언가 꿈꿨던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이미 눈부신 성과를 달성한 이후의 모습이 그려진다. 성공 후 누리게 될 부와 명성을 떠올리며  즐거운 공상의 나래를 펼친다. 춤을 배울 때는 전문 댄서처럼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여줄 모습을 기대하고, 수영을 할 때면 나비가 멋지게 날개를 펼치듯 폼나는 접영부터 배우고 싶으며(실제로 접영은 영어로 butterfly, 나비라고 말한다), 기타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배우는 사람은 성대한 음악회에서 연주하는 음악가처럼 무대에서 연주할 날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달인의 경지까지 오르려면 힘들고 지루한 과정을 거치며 수시로 찾아오는 현타의 시간을 이겨내야 한다. 걷기 전에 뛰는 아이가 없으며 서기 전에 걷는 아이도 없다. 밥이 찰지고 맛있으려면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고, 심지어 티끌까지도 존재가 드러나려면 뭉쳐질 시간이 필요하다.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는 그래프는 완만한 곡선이 아닌 계단식 상승으로 올라간다. 현타의 시간은 계단과 계단 사이의 평지 구간이다.


'나는 노력하는데 왜 안 되지."


평지 구간에 정체되어 있을 때는 이런 말을 떠올리기 쉽다. 추구하는 이상은 끝없이 올라간 벽처럼 느껴지고 그 앞에 서 있는 나는 마음이 갑갑해져 쉽게 포기를 생각한다. 당신의 이상을 벽이 아닌 벽에 걸린 그림이라고 결정하자. 내가 지금 만들 수 없는 완전한 상태는 감상용으로 걸어두고 참고만 하자. 그리고 우리는 단지 어제의 나보다 나아지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만의 작품을 만들자.


모든 대가가 자신의 이상 앞에서 무너졌다면 우리가 오늘 보는 수많은 걸작은 절대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그들은 자신의 현재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정체 구간에서 완벽이 아닌 완성에 집중했다. 수없이 작고 볼품없었던 완성의 시간을 견디고 이겨냈다.  


시간의 계단을 밟고 그 위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자.

먼지가 뭉쳐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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