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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Jan 11. 2023

끊어진 드라마는 다시 시작되고.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네 번째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단어 중 단지 떠올리기만 해도 그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단연 ‘방학’이다. 월요일 아침, 이제는 평생 그 단어와는 인연이 없을 워킹맘은 딸이 깰세라 살금살금 다니며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등교할 때는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깨우는 데만 10분 이상을 허비하게 하는 딸이 7시에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나는 방학이니 더 자도 된다고 말했지만, 딸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엄마, 내가 보는 넷플릭스 OO 드라마 어젯밤에 마지막 회를 했는데 자느라고 못 봤단 말이야. 그거 봐야 해!” 영어 공부방 시험에서 백 점을 맞았을 때조차 볼 수 없었던 저 기쁨과 설렘 가득 뒤섞인 얼굴...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눈뜨자마자 넷플릭스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왔지만 묘하게 귀여운 그 얼굴을 보고는 마음이 약해져 참을 인을 꿀꺽 삼켰다.  

    

그래 얼마나 기다렸으면 저러겠어. 그냥 재미있게 라고 혼잣말하며 아침을 차렸다. 그사이 나보다 직장이 먼 남편은 출근을 위해 먼저 집을 나섰다. 식탁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딸이 당황한 듯 나를 불렀다. 내가 식탁 너머로 의아한 듯 쳐다보자 딸은 손가락으로 어느새 검은색으로 바뀌어버린 TV 화면을 가리켰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껐다가 다시 켜봐. 뭐 잘 못 누른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딸은 리모컨을 눌러 TV를 껐다가 다시 켰고 넷플릭스를 열었다. 그러자 화면에 로그인하라고 떴다.      


우리는 여태 남편의 친구가 준 아이디로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아이는 아이디를 알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딸은 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곧 시무룩한 얼굴로 끊었다. “엄마, 아빠가 지금 출근 중이니까 이따 밤에 얘기하재...” 아이는 속이 상해서 곧 눈가가 벌게지도록 서글피 울었다. 나는 그런 아이를 겨우 달래고 출근했다.      


오후에 일하고 있는데 남편이 아이까지 있는 가족 단톡방에 회식으로 좀 늦겠다고 말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알았다고 답했다. 저녁이 되어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아이가 쪼르르 와서 물었다. “아빠, 언제 올까? 많이 늦을까? 전화해 볼까? 난 이제 영영 그 드라마 마지막 회를 못 보겠지?...” 아이는 그날 밤 중간에 끊어진 드라마가 보고 싶어 아빠를 목 놓아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딸은 일어나자마자 아빠를 깨워 넷플릭스를 열어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아이 옆에서 어제 상황을 다시 설명하며 어찌나 당신을 기다렸던지 눈물까지 흘렸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 말을 듣더니 피식 웃으며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뭘 그런 걸로 속상해했어. 이걸 다시 보려면 아빠가 친구에게 아이디를 다시 물어봐서 로그인을 해야 해. 지금은 너무 이른 아침이라 좀 그러니까 이따 물어보고 저녁에 로그인해 줄게. 조금 늦게 보는 거지 영원히 못 보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알았지?”   

  

살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열한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안달하고 좌절하고 금방이라도 지구가 멸망할 듯 모든 게 끝났다고 결론짓는가. 사실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단지 그렇게 결론 내리고 포기해 버린 자신에 의해 중단되었을 뿐 진짜 끝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밖에 없는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한탄했던 일도 시간이 흘러 내게 다시 오는 경우도 있다. 남편과 싸웠을 때마다 떠올리는 옛 애인의 얼굴처럼 나의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을 때 왔던 과거의 기회에 대해 우리는 부질없는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기와 상황이 나와 맞을 때의 기회는 내 것이 아니며 적절한 때가 오면 기회는 내가 직접 만들 수도 있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소설가 박완서는 다섯 아이를 낳아 기르며 전업주부로 살다가 많은 사람이 꿈꾸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나이 마흔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작년에 우연히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작가 정연홍은 71세에 낮에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연필로 종이를 채우며 책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를 출간했다.


그런가 하면 나에게는 서른 살에 남편과 빈손으로 호주에 이민 가서 주부로 지내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십 대가 된 두 딸을 키우며 남몰래 품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작년부터 세상에 풀어놓고 있다. 처음 어설픈 스케치부터 시작한 친구의 그림은 10개월 만에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나는 언젠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그 친구의 전시회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친구의 전시회에 가기 위해 호주에 간다니. 이 얼마나 멋진 명분인가!)      

    

많은 사람이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자신의 꿈을 잊고 살아간다. 그런 이들은 생각한다. 이걸 하기에 난 나이가 너무 많아. 난 재능이 없어. 너무 늦었어. 내 주제에 무슨... 꿈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창고 속에 고이 보관하면 꿈이 빛을 볼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꿈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무언가를 강하게 열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굴곡진 삶을 피했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사는 게 정말로 내가 원했던 삶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누구나 욕망하는 돈이나 명예, 지위에 대해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내가 자란 환경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매사 남의 결정에 의존했던 나의 성향도 한몫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랬던 내가 마흔다섯 늦깎이에 돈 한 푼 안 나오는 글이 그저 좋아서 쓰고 있다. 꿈의 드라마는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중단되었음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 꿈에 재접속 중이다. 만약 당신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꿈이 있다면 다시 한번 펼쳐보자. 당신의 꿈에 뜨거운 햇살도 시원한 바람도 때로는 거침없는 소나기도 차디찬 눈도 맞게 하자.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 시간이 당신의 남은 나날 중 가장 이른 시간이다. 기회는 꿈꾸는 자에게서 환생한다.


그날 저녁. 딸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드라마의 남은 부분을 보았다. 오래 기다린 만큼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아주 집중해서 보는 딸의 얼굴에는 기쁨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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