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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Jan 08. 2023

인생은 슬라임처럼

“또 슬라임이냐. 그게 그렇게 재밌어?”


토요일 저녁, 딸이 방에서 조용히 있길래 뭘 하나 슬그머니 들어가 보았더니 책상에 앉아 슬라임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슬라임이란 젤리처럼 말랑거리는 촉감으로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장난감이다.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그 특유의 촉감을 느끼며 연신 손으로 주물럭거리는 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마흔 넘은 엄마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놀이이다.


사실 슬라임 놀이가 유행한 지는 꽤 되었는데 아토피기가 있는 딸의 피부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여태 한 번도 사주지 않았다가 얼마 전 딸의 생일 때 하도 갖고 싶다고 하여 한 번 사줬더니 이후부터 억눌러왔던 욕구가 한꺼번에 터진 듯 딸은 매일 슬라임 삼매경이다. 그럴 때마다 난 그래도 종일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안 보고 다른 놀이를 하는 게 어디냐 싶어서 그냥 하게 두었다. (이런 걸 보면 교육상 유해하다고 생각하는 게임이나 미디어를 마냥 차단하는 것도 적정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설령 내가 차단한다고 해도 아이는 학교나 학원, 또는 광고를 통해서도 여러 정보를 얻고 있으며, 포켓몬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만화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면 급우들과의 대화에 끼기도 힘들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오늘은 아이 옆에 서서 아이가 어떻게 노는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딸은 엄마가 모처럼 관심을 자 기분이 좋았는지 놀이가 얼마나 재밌는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이게 말이야. 촉감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이렇게 손으로 꾹꾹 누르는 걸 콕콕이라고 해. 그리고... 이거 보여줄게. 이렇게 슬라임을 양손으로 잡고 길게 늘어뜨린 다음에 바닥에 내려놓고 한쪽 끝을 살짝 들고 다시 바닥에 붙이면.. 짜잔! 공기 방울 생긴 거 보이지? 이건 바풍이라고 불러. 바풍을 해서 슬라임을 다시 뭉치면.. 가까이 와봐. 톡톡 터지는 소리 들리지? 완전 ASMR이야. 이게 슬라임 하는 맛이지~”


콕콕이?.. 바... 풍?.. 한국어인지 외래어인지도 모르는 단어를 신기하게 듣고 있으니 딸은 열정적으로 침을 튀기며 얘기하고 슬라임을 밀가루 반죽처럼 계속 치댔다. 그렇게 한창 놀고 있는데 거실에서 손녀를 부르는 엄마의 소리가 들렸다. “00아, 드라마 시작했다! 빨리 와!” 두 사람이 주말드라마를 함께 보는 모습은 우리 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말 저녁의 일상이다. 딸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손에 있던 슬라임을 책상 위에 그대로 내팽개치고 쏜살같이 거실로 달려갔다.


'어이구, 좀 치우기라도 하고 가지.' 나는 두 사람이 드라마를 볼 동안 딸의 방에서 새로 산 책을 읽으려고 책상에 앉았다. 책상 한가운데에는 여전히 슬라임이 둥그렇게 늘어난 채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슬라임을 옮기기 위해 한 손을 가까이 뻗어 난생처음으로 잡아보았다. 물컹거리고 청량한 차가움이 손바닥 전체로 느껴졌다.  곧 슬라임은 감기 걸린 아이의 콧물처럼 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말 듯 대롱거렸다. 나는 얼른 다른 한 손마저 뻗어 슬라임 밑을 받쳤고 그대로 책상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책을 펼치고 거실에서 할머니와 손녀가 드라마 주인공의 못된 전 남자친구에 대한 흉을 보는 걸 정겹게(?) 들으며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몇 장이나 읽었을까 문득 옆을 보니 좀 전에 뭉쳐 놓았던 슬라임이 다시 부채처럼  펼쳐진 채 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어라? 아까 분명히 똘똘 뭉쳐놓았는데 언제 저렇게 다시 펴졌지? 나는 의아해하며 손으로 슬라임을 종이 접듯이 접어버렸다. 그러자 슬라임이 다시 천천히 원래대로 넓게 퍼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신기하여 책을 잠시 내려놓고 슬라임을 책상 가운데로 다시 가져왔다.


아까 딸이 한 것처럼 손가락으로 꾹꾹 구르자 구멍이 송송 뚫려서 바닥이 보였지만 구멍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채워지고 슬라임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슬라임을 만지기 시작했다. 주먹을 쥐며 쥐어짜 보기도 하고 딸이 한 것처럼 바풍을 해보기도 하고, 수제비를 만들 때처럼 조금씩 뜯어서 떨어트려 보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쥐어짜고, 때리고, 찢고, 짓눌러도 슬라임은 절대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처럼 다시 서로서로 안정적으로 달라붙어 팽창했다. 나는 넓게 퍼졌던 슬라임을 조심스럽게 전용 용기에 담았다. 슬라임은 인기척에 놀라서 동굴로 후다닥 들어가는 뱀처럼 용기로 쏙 들어갔다.


회복 탄력성이란 실패나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원래의 안정된 심리적 상태를 되찾는 성질이나 능력을 말한다.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회복탄력성이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힘이다. 행복이란 행복한 나날을 얼마나 많이 보내느냐에 따라 달린 게 아니라 나를 짓누르는 불행에 맞서 얼마나 다시 용수철처럼 일어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내게 찾아온 불행을 한낱 넘어야 할 장애물로 인식하고 이겨내면 그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진정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장애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점점 단련되고 몸과 마음의 회복 속도 역시 빨라진다.


그러나 물처럼 자신의 온전한 모양이 없는 슬라임을 잘 보관하려면 알맞은 용기가 필요하듯이 나의 회복탄력성을 유지하려면 적절한 마음 그릇이 필요하다.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김주환 교수가 쓴 베스트셀러 [회복탄력성]에서는 회복 탄력성 지수를 가늠하기 위해 KRO-53 테스트가 수록되어있는데 자기조절능력, 대인관계능력, 긍정성의 세 가지 점수를 총합하면 나의 회복탄력성 지수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테스트의 기준으로 미루어보아 긍정성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잘 조정하여 대인관계 능력을 향상하면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냐고 한탄할 시간에 어떻게 이겨낼지 고민하고 싶다. 그 어떤 시련에도 꿋꿋이 일어나서 당당 내가 가진 꿈을 채우고 부풀리고 싶다. 건강한 마음 그릇에 담겨 오래오래 예쁜 모양을 유지하고 싶다. 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행복하게 여기고 싶다.

나는 인생을 슬라임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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