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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Feb 19. 2023

가족의 근간. 부부.

“엄마, 엄마는 아빠랑 영원히 같이 살 거야?”


 일요일 저녁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던 딸이 갑자기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나는 약간 당황스러운 마음에 대답보다 질문을 먼저 날렸다. “아니,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주인공의 친구 부모님이 이혼하게 되니까 친구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랑 같이 살기로 했대. 이 아이는 엄마와 새아빠랑 사는 것보다 진짜 아빠랑만 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나 봐. 그래서 나는 만약에 엄마랑 아빠가 헤어지면 누구랑 살아야 하나 잠깐 생각했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의 말을 듣던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했다. 어색한 몇 초의 공기가 흐른 뒤 다시 정신을 번뜩 차린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엄마는 아빠랑 영원히 같이 살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부모라면 한 번쯤은 물어보게 되어있는 그 질문을 던졌다.   


“만약에 엄마랑 아빠가 헤어지면 너는 누구랑 살 건데?”      


눈동자를 오른쪽 위로 치켜들고 고민에 잠긴 듯한 딸이 곧 대답했다. “아빠랑 살아야 하나.. 엄마랑 살아야 하나.. 흠.. 나는 그냥 할머니랑 살래.” 딸의 짐짓 비장한 대답에 아주 싱거운 찌개를 맛본 듯한 내 기분은 금세 두 눈썹을 찌푸리게 했다. 나는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딸의 머리를 콕 쥐어박고는 엄마랑 살아야지 무슨 소리냐고 유치한 감정을 내비쳤다.      


엄마보다 어른스러운 딸은 그런데도 끝까지 할머니랑 살겠다고 선언하며 할머니 방으로 쏜살같이 가 버렸다. 딸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문득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견디기 힘들었던 날도, 다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싶었던 날도 물론 있었지만 그만큼 웃고 행복했던 순간도 많았다. 우리 딸이 처음 세상에 태어났던 날, 흔들거리며 조심스럽게 첫걸음마를 뗀 날, 아빠 엄마라는 단어로 말문을  날을 흐뭇하게 공유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과 헤어진다면 늙어서 무슨 삶의 낙이 있겠는가.      


어차피 남은 평생을 남편과 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유쾌한 추억을 계속 만들어야겠다. 행복이 그저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맑게 흐르는 시냇물의 찬란함에 두 발을 담가 순간의 시원함을 즐기듯이 함께 흘러가는 세월즐겨야겠다. 관대한 눈으로 그의 실수는 적당히 덮어버리고, 너그러운 귀로 상처의 말도 넘겨버리자.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자. 자식이라는 끈으로 묶인 사람에게 관대해지려면 먼저 나 자신에게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내게 먼저 따스한 햇살을 내리쬐자. 물도 주고 사랑도 듬뿍 주자. 내 영혼이 화사한 꽃을 피우게 되면 너그러운 향기는 집안 전체에 퍼진다.      


철없던 시절, 아직 익지 않았던 사랑은 아팠다. 좋은 순간은 가면이었고 슬픔과 고통으로 점철된 대부분의 시간이 순수한 사랑의 진짜 얼굴이었음을 나는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뜨거운 불을 끌어안는 것처럼 가지고 싶어도 완전히 가질 수 없는 어리석은 환상에 나는 이제 속지 않는다. 날카롭고 가시 돋친 미숙했던 사랑은 나이 듦에 따라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중화되었다.      


삶의 아픔을 겪을 때마다 개인의 상처는 성숙이라는 이름으로 치유되었다. 성숙해져 가는 두 경험의 총체가 위기의 순간으로 위태로울 때면 서로에게 부부라는 이름으로 내일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자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두 성숙의 존재는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서로를 애잔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     


아무리 힘들었던 하루라도 빛나는 유리구슬 같은 순간이 드문드문 놓여있다. 어릴 적 구슬치기 하듯 성기게 놓인 구슬과 구슬을 쳐서 빛의 연결 고리를 만들자. 고리가 길어질수록 알고리즘이 생겨나고 빛나는 순간은 다음 빛을 계속 끌어당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사람이 없듯이 하루아침에 단단한 가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족이란 존재의 의미를 잊지 말자. 나의 행복의 원천은 그곳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부부가 있다.


한 줄 요약 : 황혼 이혼을 꿈꾸며 살다가도 나이 들어가는 배우자의 모습에 애잔함을 느끼는 게 결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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