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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Feb 24. 2023

혼돈의 막걸리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모임이 있어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글쓰기 모임을 시작으로 인연이 된 사람과의 만남이라 비록 자주 보지는 못해도 내 마음은 이미 친근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로의 글을 통해 영혼을 읽어 내린 사이란 오랜 시간 내 곁에서 함께한 친구와도 견줄만하다.


시계만 쳐다보던 두 눈이 귀에 환청 소리를 날렸다.  퇴근 시간 정각이 되자마자 육상선수가 출발 신호에 전속력으로 달리듯 나는 동료에게 서둘러 인사하고 총알같이 전철역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인 교대역 근처 중국집에 도착하니 이미 다들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어색함은 잠시, 웃고 떠들며 얘기하다 보니 자리는 어느새 3차로 이어졌다. 우리는 마지막 장소인 막걸릿집에 앉아서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이번에는 뭘 먹을까 즐겁게 궁리했다. 주문한 막걸리와 안주가 도착하고 누군가가 술을 잔에 따라주기 위해 막걸릿병을 들고 흔들었다. 내 잔을 포함해서 차례로 빈 잔들이 채워졌다. 그때 모임 리더인 권수호 작가가 자신은 막걸리를 흔들지 않고 마신다며 따로 한 병을 더 주문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탁주를 흔들지 않고 마신다니 나는 의아해서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렇게 마시면 머리가 안 아파요.”


그는 점원이 추가로 가져다준 막걸릿병을 들고 조심스럽게 잔에 따르며 설명했다. 내가 그의 잔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한번 맛보라고 잔을 내쪽으로 내밀었다. 누룩과 최대한 섞이지 않은 잔 속의 술은 청아한 상앗빛을 띠며 수면 위로 잔잔한 물결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한 모금 마셔보았다. 산뜻하고 시큼한 동시에 달짝지근한 맛이 혀 전체에 퍼졌다.


내가 마시고 있던 막걸리의 맛과는 사뭇 달랐다. 신선하고 색달랐지만, 걸쭉한 막걸리를 마시던 내게 그 맛은 왠지 밍밍하고 허전했다. 맑은술을 더 권하는 그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내 술잔에 있던 뽀얀 술을 다시 들이켰다. 탁하고 진한 맛이 목구멍에 흘러내렸다. 술과 누룩이 무질서하게 섞인 흐리터분함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더 편하게 해 주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하게 살고 싶다. 고 생각하곤 했다.


상처받을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했다. 즐겁고 행복하고 좋은 일만 경험하고 싶었다. 남들하고 아웅다웅 다투지 않고 싶었다. 적당한 거리를 갖는 직장에서의 관계가 때론 힘겨웠다. 어떤 날엔 이대로 어디론가 멀리 사라지고 싶었다. 세상사 견디기 싫어서 대나무 숲으로 뛰어 들어가 겉만 멀쩡한 내 귀는 더 이상 못쓸 썩은 귀라고 지독한 욕을 하고 싶었다.


무결한 삶을 살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지금보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


완전무결한 삶은 틀에 박힌 삶이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돌아가고 그 세계에서는 작은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다. 지루하고 재미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만 해도 목이 졸리듯 숨이 막힌다. 내가 만약 완벽한 세상에서 산다면 나는 아이가 하나하나 조각을 맞춰서 벽에 걸어놓은 퍼즐 그림처럼 빈틈없이 꽉 끼어있는 세계에 유일하게 아귀가 맞지 않는 불필요한 퍼즐 조각이 되리라. 그런 삶에서 유일한 옥에 티는 나 자신이다.


나는 이쯤에서 자신에게 다시 물어야겠다. 나는 정말 그런 삶을 원하는가? 실수와 후회로 얼룩져 하얀 화이트로 전부 덮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지난날이 과연 부끄럽기만 한가?


더 어긋날 것인가. 여기에서 그만할 것인가. 언제까지 타인의 결정에 의존해서 살 것인가.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지금의 나는 수많은 내면 전투의 결과다. 불완전한 존재인 나는 때로는 꺾이고 굴복했다. 영원히 어둠의 터널에 갇혀서 살 줄 알았던 순간을 보내고 전혀 아름답지 않게 기어서 빛으로 나왔다.


내 삶은 아름답지 않았다. 진짜 삶은 퍼즐의 완성품에 있지 않고 퍼즐과 퍼즐 사이의 균열에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좋다는 이승의 진짜 정체는 개똥 자체다. 모래 한 알 없는 대리석에서 걷는 삶은 TV 속 가짜 쇼일 뿐이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보험회사 직원인 주인공 트루먼은 작은 섬에서 평범하고 행복했던 삶이 사실은 방송국의 각본에 의해 짜인 조작임을 깨달았다. 그의 삶을 기획하고 전 세계에 방영했던 기획자는 목숨을 걸고 진짜 삶을 찾아 배를 타고 떠나는 트루먼에게 신의 목소리로 말한다.


“바깥세상도 다르지 않아 같은 거짓말과 같은 속임수. 하지만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내가 만약 트루먼이었다면? 해변의 모래 한 알까지 다 나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나 역시 미련 없이 개똥을 찾아 떠나리라. 그게 인간이란 존재다. 그게 나라는 생명이다.

     

나는 짙은 막걸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천천히 잔을 비우고 한 잔을 더 따라 마셨다. 잔이 바닥을 드러낼수록 나는 혼돈의 웃음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여타의 세상 이치가 그러하듯 다음날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다.


한 줄 요약 : 개똥철학으로 고집부리다 두통으로 닭똥 눈물을 흘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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