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가지의 테마로 읽는 <Love & Anarchy>
눈이 많이 내린 어느 겨울 밤, 굉장히 무료하고 쓸쓸한 무드에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인 스웨덴 드라마 러브앤아나키(Love & Anarchy)를 보게 되었다. 첫회부터 숨쉬기 힘든 긴장으로 나를 몰아세우며 마지막 회차까지 숨가쁘게 달리게 해서인지 다 보고 난 뒤에도 흥분으로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흥분은 공포물과 스릴러를 볼 때의 것과 격이 달랐고, 달달한 로맨틱 코메디의 야릇한 흥분과도 달랐다. 여하튼 정체모를 그 흥분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이 드라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지만 감상적인 평이 될까봐 며칠을 묵혔다. 그러다 잊어버리게 되면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주가 흘렀고 나는 결국 이 글을 쓰고 있다. 2주 동안 이 드라마의 모든 것들이 계속 떠올랐다. 배우들의 스타일, 스웨덴의 정치사회문화, 그들이 했던 스릴 넘치는 게임들, 무엇보다도 현실을 전복하는 그들의 방식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장 스웨덴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억누르며 비행기 티켓을 끊는 대신 스웨덴 브랜드의 옷을 사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삼아야 할 정도였다. 나를 이토록 사로잡은 그 흥분은 소피(Ida Engvoll)의 억눌린 '자기다움'에 대한 해방감과 닮았고, 비정규직 IT서비스 직업을 가진 맥스(Björn Mosten)의 사회적 불안이 '소속감'이 될 때의 그 따듯함과 비슷하다. 이 드라마에 대한 자세하고 지극히 객관적인 리뷰가 없는 관계로 다섯가지의 소주제로 이 드라마를 전격 분석해보고자 한다.
<러브앤아나키>는 소피와 맥스의 사랑이야기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맨틱 코메디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 둘의 사랑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더 사랑의 본질에 가까운 드라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소피는 맥스가 일하는 출판사의 영업부진을 돕기 위한 전문컨설턴트로 고용된다. 맥스는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비정규직 IT 기사로 시외곽 쉐어아파트에 살며 출판사의 잡일들을 처리하는 일을 한다. 둘은 사내에서의 계층상으로도, 사회적 위치상으로도, 나이대에서도 공집합이 없는 관계다. 그것을 서로도 모르지 않다. 그래서 소피는 맥스를 함부로 대하고, 맥스는 그것을 감내한다. 소피의 명령으로 인해 낮에 하지 못한 일을 밤에 하기 위해 다시 사무실로 온 맥스는 소피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자위하고 있었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게 된다. 그렇게 소피의 약점을 쥔 듯했지만 곧 관계는 다시 전복되고 두 사람의 아슬하면서도 이상한 게임이 시작된다. 서로가 시키는 이상한 명령들을 수행해 내는 것이 이 게임의 룰!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이 단숨에 놀이의 장이 된다. 맥스의 명령으로 회사내에서 하루 종일 뒤로 걷는 소피, 소피의 명령으로 회사에서 대표 흉내를 내는 맥스, 어떤 때는 누군가를 격하게 혼냈다가, 어떤 때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 이 이상한 게임 덕에 소피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억눌려 있던 진짜 감정을 되찾게 되고, 맥스는 정규직으로의 편입과 동시에 가족으로부터 외면받았던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불가능의 존재가 되면서 소피는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일(남편의 삶의 방식대로 살지 않겠다는 의견피력)을 하고 맥스는 불투명했던 자신의 미래를 조금씩 희망으로 채워나가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둘의 사랑을 주축으로 배경이 되는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다양한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직장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동료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던 경험이 있거나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프리드리히와 캐롤라인의 우정을 보면서 삶의 위로가 필요한 순간, 측근에서 가장 오래봤으나 전혀 나를 이해해줄 것 같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그리하여 특별한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줄 수있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나도 누군가에게 적당한 위로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성편집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처녀작'이라는 말을 쓰는 데니스를 꾸짖는 그녀의 연인 페미니스트 작가와의 사랑을 레즈비언 커플이라 유난떨지 않고 여느 이성커플들과 다름없이 인식하는 출판사 직원들의 모습은 한국에서는 아직 불가능한 연출이라 부러움을 자아낸다. 소피와 맥스의 사회적계층과 나이를 초월하는 사랑에서부터 동료를 신경쓰고 배려하는 사랑, 동성에 대한 사랑, 자기 일에 대한 사랑,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드라마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에서 어딘가 살짝 벗어나 있음을, 그 벗어남이 이 드라마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웨덴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문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 드라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도 몇몇의 에피소드를 통해 스웨덴이라는 나라의 사회정치문화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다. 내가 이 드라마를 높이 평가하는 두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레미제라블>이 지금도 좋은 문학작품인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삶과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서이다. 그 문학작품 하나만 읽어도 우리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러브앤아나키>는 2020년의 스웨덴의 모습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로 촘촘히 짜여있다.
스웨덴도 영국과 같이 입헌군주제 형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 원수로 국왕이 존재하며 다양한 정당이 뽑은 총리가 정치적 권한을 가진다. 제1당은 사회민주당으로 40년 째 정권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그 외 총 8개의 정당이 존재하는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다. 사회민주당이 제 1당이 되면서 스웨덴은 지금의 복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사회민주당이 40년째 정권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피의 아버지는 스웨덴 사회가 우경화된다는 우려와 걱정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이다. 틈만 나면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를 하고, 초대 받지 못한 손녀의 생일파티에 몰래 와서 자본으로 사회가 병들었다며 소란을 피워 정신병동에 갇히기도 한다. 소피의 아버지가 우경화될 스웨덴을 걱정한 이면에는 2018년도 선거에서 높은 지지율로 제 1당인 사민당을 위협하며 제 3당이 된 스웨덴민주당(극우정당)의 등장이라는 정치적인 배경을 짐작해볼만 하다. 40년째 정권을 유지해온 사민당은 초심을 잃고 부패했으며 야당은 안일하고 무능했으니 스웨덴 국민들은 '스웨덴을 스웨덴 답게'라는 민족우월주의, 민족차별주의를 골자로 하는 스웨덴민주당을 제 3당으로까지 지지해주게 된 것이다.(어디서 많이 본듯한...정치현상도 유행이 있는듯 하다) 이런 정치적인 상황 또한 놓치지 않고 스웨덴의 과거와 현재를 살아온 과도기적인 인물의 삶에 녹여내 가족간의 사랑과 이해, 그리고 사회의 한 일원으로써의 개인의 삶에 대해서까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맥스의 쉐어하우스에서 살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은 현 스웨덴의 청년실업률과 비정규직 문제를 대변한다. 오랜 노력 끝에 결국 정규직이 된 맥스의 조촐한 축하자리에서 쉐어하우스 친구들은 이야기 한다. 소득 수준에 따라 월세를 비율대로 분활해서 내자고 논의하고 취미로 식물을 키우는 맥스의 방에는 창문이 있어서 일조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돈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이 오고간다. 방이라고 해봤자 문도 없어 천으로 가림막을 해두고 화장실 창문처럼 작은 창이지만 맥스는 친구들의 요청을 불만없이 모두 수용한다.
이 장면에서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가지를 발견한다. 고용 불안정의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 스웨덴 모두 공통된 과제라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소득에 따라 분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스웨덴 문화와는 달리 한국 사회에서는 소득의 재분배에 매우 인색하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한국의 드라마에서도 나는 이런 장면을 본적이 없다.
유럽의 영화들을 통해 만나는 몇 명의 배우들에게는 할리우드 배우들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비포미드나잇에서의 줄리델피, 클라우즈오브쉴즈마리의 줄리엣비노쉬, 언노운걸의 아델에넬에게서 배우 자신의 아름다움 보단 완벽하게 작품 속 인물로 분한 인물의 아름다움을 본다. 끊임없는 운동, 식단관리, 다이어트, 성형 등의 자기 관리를 나이 들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함이 배우들의 제 1의 덕목처럼 여기는 한국과 할리우드 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러브앤아나키>의 등장인물들도 주인공 소피부터 맥스, 출판사의 주요 인물들까지 모두 언제든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한 외모와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유난히 나체씬이 자주 등장하는데 주인공들 모두 이 나체씬에 대해서 부담감이 없어 보인다. 맥스역의 Björn Mosten는 97년생에 키가 190가까이 되는 건장한 체형지만 근육질의 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올 누드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그냥 살집이 약간 있는 정도의 자연스러운 이십대 초반의 몸이다. 얼굴의 여드름 마저도 숨김없이 그대로 노출한다. 이는 노출씬이 등장할 때마다 '성난등근육' , '완벽한S라인' 등의 이슈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한국의 드라마와는 또다른 지점이다. 바로 이런 지점이 이 드라마를 돋보이게 하는 세번째 관전 포인트다. 다양한 체형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각자의 체형에 맞는 스타일링을 보여줌으로써 극에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배우들의 모습에서 친근함과 친숙함을 느낀다.
맥스만큼이나 나체신이 많은 소피역의 이다앵볼 역시 빼빼 마른 몸매와는 다르다. 군더더기 없는 몸매는 맞지만 억지로 가꿔진 모습이 아니라 두 아이의 엄마 역할에 걸맞게 아랫배도 볼록 나오고 허벅지에 살도 좀 있는 탄탄하면서도 우리가 목욕탕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체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소피는 회차가 거듭될수록 자아갈등이 심화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노메이크업인 상태로 나온다. 부시시한 머리에 화장끼 전혀 없는 얼굴은 잡티와 기미가 그대로 드러나 실제 85년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보일 정도다.더 젊게, 더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여배우 공식을 깨고 극강의 내츄럴 스타일링을 한 이다앵볼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얼리티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오래전 어느 패션잡지에 실린 프랑스 배우 샬롯갱스부르의 인터뷰를 읽고 신선한 자극을 받은 적이 있다. 기자가 그녀의 스타일에 대해서 멋스러우면서 신경안쓴듯한 파리지앵 패션의 정석이라고 추켜세우자 샬롯은 자기는 옷도 잘 안갈아입고 옷을 잘 사지도 않는다면서 평소 좋아하는 옷이 있으면 그것만 일주일 내내 입는다고 했다. 심지어 인터뷰하면서 신고 있었던 부츠도 며칠째 신고 있는 것이라면서 그냥 좋아하는 옷을 오래 입는 것이 좋다는 그녀의 말은 지금도 옷을 고르거나 옷을 코디할 때 아직도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유럽의 패션이 신경안쓴듯하면서도 멋스러워 보이는 건 아마도 이런 단순함과 심플함이 자신의 개성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러브앤아나키> 등장 인물들의 패션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급스럽거나 막 세련된 느낌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의 패션은 자연스럽고 멋져보인다. 심지어 맥스는 빈티지한 스타일의 니트를 몇 회차에 걸쳐 계속 입고 나오는데 한국드라마에서는 여간 보기 힘든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씬의 연장이 아닌데도 같은 옷을 여러번 입고 나옴으로써 그가 현재 처한 경제적인 상황이나 맥스의 자유로운 성향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맥스는 주로 니트 비니, 모코트 형식의 쟈켓과 보카시 니트, 헐렁한 청바지를 매치하는데 이런 스타일이 맥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반면 전문 컨설턴트 직업을 가진 소피의 패션은 다양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지향한다. 회사에서 대표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지만 정장패션만 고수하지 않는다. 특히 맥스와 같이 나오는 씬에선 심플한 모직코트에 비니 모자를 매치하거나 청바지에 박시한 니트를 매치해 편안한 룩을 선보인다. 전문적인 직장인 여성임을 드러낼 땐 셔츠형 블라우스와 화려한 패턴이 가미된 쉬폰 블라우스 등을 청바지나 블랙진에 매치해 화려하고 당당한 이미지를 추구한다. 딸의 생일파티에서 입은 은색의 스팽글 원피스는 소피의 남편이 극중에서 묘사하듯 "미러볼 부인" 그 자체로 개인적으로 소피의 패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이었다. 소피의 패션은 로맨틱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직장인 룩으로 참고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출판사의 주요 인물인 데니스는 여성 편집자로 자기 주장이 강하고 페미니스트이며, 작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기 주장을 펼치기 때문에 강렬하면서도 심플한 의상을 추구한다. 블랙계통의 의상에 포인트가 될 악세서리 하나 정도를 매치하여 데니스의 깔끔하고 스마트한 인상을 강조한다.
소피의 비서이자 사무실의 운영 관련 잡일을 하는 캐롤라인의 경우 러블리하고 순수한 그녀의 성격을 반영하듯 플리츠 치마나 옐로우계통의 니트, 랩스커트원피스 등을 주로 매치한다.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지극히 현실적인 직장인룩을 선보이는데 단순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그 캐릭터의 성향과 맞아떨어지면서 특유의 무심한듯 멋스러운 룩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패션의 디테일 또한 이 드라마의 주요 감상 포인트라 하겠다.
Anarchy는 '무정부상태'를 의미한다. 어떠한 권력이나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love 와 만나 하나의 제목을 이루고 있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 생경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이 드라마의 제목인 Love & Anarchy 에 대해서 고찰해보는 것으로 이 긴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소피의 딸 이사벨은 똑똑하고 지적이지만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녀에게 제일 친한 친구는 할아버지이다. 학교 개인 면담에서 소피부부는 이사벨의 사회성 결여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피의 남편은 딸이 소피의 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이사벨의 생일파티에도 부르지 말자고 제안한다. 소피는 남편의 자기중심적인 요구나 아버지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과격한 행동 때문에 정신병동을 드나들던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싶었기에 소피는 남편의 속물적인 행동에 동의하지도 않으면서 반대의견을 정확히 피력하지도 않는다. 남편처럼 살아야지만 아버지와 다르게 살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필요할때마다 옆에 있어주기 보다는 사회걱정으로 언제나 거리에 있었던 아버지였기에 소피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다. 남편에게는 아버지가 '노망난 노인네'이지만 소피와 이사벨에게 그의 아버지는 '자기답게 살아라'라고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라는 목표에서는 남편이 정답처럼 보였지만 맥스와의 이상한 게임 때문에 금기시되는 것에 도전하면 할수록 소피는 자신이 스스로 옭아멘 억압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결국 남편의 권유와 결정대로 출판사를 관두고 영국으로 이주하려고 했던 소피가 남편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 한 스파모임에서 보기좋게 그들을 한 방 먹이고 목욕가운만 걸친채 출판사에 난입해 사업설명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뒤 진정한 해방감을 느낀듯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할 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러브앤아나키>에서는 억압이나 사회에 도전하는 수단으로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노출을 사용한다. 수영장에서 소피의 하의 노출, 자신을 무시하는 친어머니에게 더이상 휘둘리지 않겠다라는 도전으로 어머니 생일파티를 초토화로 만든 맥스의 올누드, 그리고 직장내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소피의 목욕가운씬 등은 현실을 전복하고 관계를 해체시키는데에 주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아나키 사건이 없었다면 소피는 '나 다움'을 되찾지 못했을 것이고, 맥스는 어머니의 애정결핍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소피의 목욕가운 난동으로 사업설명회를 망치지 않았다면 출판사는 거대 자본회사로 인수되었을 것이고, 소피의 수영장씬 노출이 없었다면 맥스와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발가벗음'이야 말로 개인이 사회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과격한 행위이자 금기에 대한 도전으로 완벽한 아나키 현상이지 않을까. 따라서 아나키는 러브만큼이나 중요했다.
이 글을 처음 기획할 때부터 아나키와 러브는 한 쌍의 연결고리였다. 우리를 옭아메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조건, 시선, 관계에 얽메여 틀에 박힌 일상을 전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아나키를 소재로 삼은 건 참으로 신선하고 전복적인 소재의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시대장르물 드라마가 아닌 현대드라마에서 그것도 로맨틱코메디 장르에서 아나키를 이렇게 사랑스러운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니, 스웨덴이라는 문화적 바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처한 현실문제에 대한 방법론으로 아나키적 사건을 고려해볼 수 있는 시선의 확장도 생겼으니, 로맨틱 코메디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휴먼드라마라고 하기엔 너무 섹시한 이 드라마, 당신에게는 어떤 흥분을 안겨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