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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봄여기 Jan 31. 2021

과거의 시간이 말을 걸어올 때, <The Dig>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

금요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울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한양을 지켜라>의 전시회를 관람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삼군영 소속의 한 군인 집안의 일대기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켜낸 군인들의 실생활을 볼 수 있는 전시로 전시의 주제처럼 왕이나 희대의 영웅이 아닌 평범하고 직급도 낮은 심지어 가난하기까지했던 한 군인 집안이 어떤 생활을 했느냐가 테마다. 당시의 군인 의복, 전쟁에 나갈 때 입던 갑옷, 이지건 집안에서 남긴 기록 등이 전시된 코너를 휙휙 스치며 보고 있었는데 문득 귀퉁이 모두 닳고 누렇게 색이 바랜 한지에 가지런하게 쓰여진 300년 전의 책들이 전시된 코너에 시선을 빼앗겨 한참을 서 있었다. 읽을 수 없는 한자들이었지만 내게 어떤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6명의 식솔을 거느린 군인은 너무 가난해서 낮에는 군인으로 일하고 저녁엔 짚신이나 놋그릇 등을 파는 등의 일을 했다거나 방이 두 칸 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대여섯명이 함께 살았다는 등의 이야기들 말이다. 300년 전에도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일상의 순간들을 버텨냈고, 10키로 가까이 되는 갑옷을 입고 전쟁에 나갔으며, 자식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중요한 시험에 떨어져 자책하기도 하고, 허무한 이유로 죽기도 하는 시간들을 살았던 것이다. 유물이 없었다면, 그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가 과거의 시간과 대화할 수 있는 순간을 가질 수 있었을까.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넘어 지금의 내 나이대와 비슷했던 여섯 식솔의 가장이자 임진왜란 참전 군인이었던 한 남자의 삶이 2021년 영하 10도 이하까지 떨어지던 추운 겨울날에 내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죽어요
결국에는 죽고 부패하겠죠
계속 살아갈 순 없어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인간이 최초의 손자국을 동굴에 남긴 순간부터
우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됐어요
그러니 정말로 죽는게 아니죠

<더디그>는 고고학자 이디스 프리티(Edith Pretty)와 발굴전문가인 바질 브라운(Basil Brown)이 1939년 6세기 잉글로색슨족 역사 연구에 중요한 'Sutton Hoo'를 발굴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축으로 2차세계대전 발발이라는 역사적인 배경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심도있게 그려낸 영화다. John Preston의 소설이 원작이며 몇몇의 사건들을 제외하면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별한 사건도 다이나믹한 드라마도 없지만 마음에 오래 남을 아름다운 대사와 영상, 배우들의 쓸쓸한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나아간다. 재산을 들여 위대한 유물을 발굴한 이디스 프리티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유물 발표 당시 은폐된 바질 브라운의 숨은 공로를 공개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금요일에 봤던 전시회와 이 영화는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과거의 흔적을 통해 존재라는 물음을 가진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기에, 과거의 시간을 연구한다. 프리티는 자신이 발굴을 요청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료가 되는 유물들을 찾아냈지만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 그런 프리티에게 브라운은 발굴은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에게 말을 걸어오며 시간을 초월해 끊임없이 무언가의 일부로 연결되어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다들 저더러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실패했다고요.

로버트,
우리 모두 실패한단다.
매일 실패하지.
절대 해낼 수 없는 일들이 있거든
아무리 노력해도 말이야.
 

심장기저질환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프리티는 어린 아들 로버트를 두고 떠나야 하는 슬픔과 죽음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존재의 덧없음에 대해서 회의한다.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수 천년의 시간이 흘러도 파헤쳐지지 않으면 결국 부패되고 사라질 존재라는 것에 대한 회의감으로 때때로 무너진다. 로버트 또한 어머니의 병세를 모르지 않다. 실제로 이디스는 47세에 로버트를 낳았다. 심장기저질환으로 59세에 사망했으므로 사망 당시 로버트는 12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기록으로 남아있는 발굴 현장사진에서 로버트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영화에서처럼 실제의 발굴 현장을 놀이터 삼아 자주 오고가며 브라운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일찍 존재의 부재를 경험한 로버트는 어머니마저 잃을까 두려워한다. 오로지 한가지 일에만 몰두하고 그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 천직인 바질브라운은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이 해왔던 일에 대한 신념대로 두 사람을 위로하고 다독인다. 수많은 죽음앞에서 서 본 자만이, 실패에 익숙한 사람만이, 그리고 그 실패가 결단코 우리의 노력으로 될 수 없는 것들임을 알기에 브라운의 말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울림을 준다.



인생은 덧없이 흘러요
그렇더군요
붙잡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어요


발굴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는 로리에게 로버트는 왜 사진을 찍냐고 묻는다. 로리는 붙잡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남편과의 결혼이 원만하지 않은 페기는 불행한 결혼과 로리와의 설레임 앞에서 망설이며 로리가 그동안 찍은 사진들 앞에 선다. 수많은 사진 속에서 자신이 등장한 사진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오열하는 페기에게 이디스는 붙잡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조언한다. 발굴은 원만히 진행되어 시민들에게까지 공개되고 세계2차 대전은 결국 발발하고 만다. 남편에게 이별을 고한 페기는 전쟁으로 떠나는 로리와 마지막 밤을 보내고, 로버트와 이디스, 브라운은 유적지의 배를 타고 우주로 미지의 항해를 떠난다. 이디스는 떠나고, 발굴되었던 배는 흙에 다시 묻힌다.

이 역사적인 발굴현장에 참여했던 모든 인물들은 이제 과거의 시간이 되었다. 유적이 발굴되고 10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흔적은 영화와 사진을 통해 기록으로 남았다. 죽음이 결코 존재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위대한 흔적으로 남지 않더라도 이 세계의 한 일부분으로 보태어지는 것이라고 떠난 이와 남아있는자,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자에게 과거의 시간은 계속 말을 걸어올 것이다.


 

<발굴 당시의 기록으로 남겨진 사진들>

왼쪽부터 : 출처유물 실제사진(아래의기사에서 참고) / 발굴현장사진(영국박물관에서참고) / 당시의 바질브라운(박물관에서 참고)
왼쪽부터 : 땅에 묻힌 배의 윤곽이 드러났을때의 사진(박물관참고)/ 웃고 있는 로버트(박물관참고)


<함께 보면 좋은 기사 링크>

Sutton Hoo_BBC (BBC에 실린 Sutton Hoo의 기사)

https://www.historyvshollywood.com/reelfaces/the-dig/ (실화와 영화에 대한 비교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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