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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봄여기 Nov 11. 2021

어떤 이별

21년 5월 18일의 메모를 이어…

사르트르가 무질서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았다면 나는 완벽한 질서의 체계만이 나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었다. 내가 속한 환경은 이미 너무나도 무질서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질서체계에 속하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같았다. 사람들이 평범한 삶이라 부르던  일상이 내겐 유독 불친절했던 유년기를 보냈다.


생존이 먼저인가, 존재가 먼저인가. 둘은 동의어 같으면서도 완전히 격이 다른 반의어 같다. 존재하기 위해서 생존하는가, 생존하기에 존재하는가 무엇이 먼저라고 말할 수 없는 애매함으로 생존하기 급급하던 시절도 있었다.


스무 살 이전까지 개신교의 그늘 아래 살았지만 결국 신앙은 가지지 못했다. 기독교의 유일한 목적은 지상의 모든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있고, 나의 지향은 영혼도 육신도 없는 ‘무’의 상태에 있었다. 완벽한 ‘무’에게로의 환원이야말로 내가 가장 궁극적으로 바라는 ‘구원’의 모습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태생적으로 나와 맞지 않았다. 지옥이나 천국, 어떤 모양의 내세이든 ‘지금 여기에서의 내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의미 없고, 그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고 싶지 않다. 성서의 어떤 구절도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으므로 ‘구원’은 내게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들의 자기기만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 구원이라니... 이기적이고 오만한 인간의 나약함, 그것은 구원의 다른 이름이다.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대면하는 것뿐이다. 사르트르가 ‘영웅의 환상’을 통해 스스로 불가결한 존재임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나는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어 영웅이 구하러 와주길 간절히 바라는 유희에 빠져들었다. 철저한 고독과 차별 속에서 언젠가는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와 주길 기다리는 소공녀 역할 속에 나를 놓아두곤 했다. 하굣길에 불현듯, 시장 어귀에서 문득 젊은 여인의 간절한 눈길과 닿을 때마다 나를 데리러 온 친엄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분명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어느새 상상 이상의 것이 되었다. <2021년 5월 18일의 메모>


이어 어떤 글을 쓰고 싶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는 마음처럼. 기억나지 않는 이 글의 결말은 도통 모르겠지만 오늘은 존재를 위협받는 슬픔 속에 놓여있고 두 시간 전부터 자려고 누웠지만 잠들 수 없고 수면제를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므로 잠들기를 포기한 채 기억도 나지 않는 이 메모를 붙잡고 쉼표 없이 단어를 이어 붙이며 문장을 쓴다.


슬픔은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았는데 마침표를 찍게 된 문장에 있다. 더 이상 신뢰를 회복할 수 없는 마음, 나와 같지 않은 마음, 이해받을 수 없는 마음, 이십 년 간의 시간을 초월한 배신감, 모욕감, 분노를 넘어서 스스로를 기만한 베스트 프렌드라는 허울, 그런 허울이 필요했던 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 친구를 오랫동안 애정 했다. 애정에 쉼표를 찍으니 애증이 되고 상대에겐 부담이요, 나에겐 베스트 프렌드였던 그 관계에 오늘 마침표를 찍었다. 슬픈 건 관계가 끝나서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주고받았던 문장들이 참혹하고 가여워서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이해받고 싶었고, 때론 이해를 강요한 것도 같다. 나는 매번 실망하고 이해하고, 직진하다 상처 받고, 다시 이해하고, 이해하는 척, 참고, 섭섭해하다 어느 순간 내가 멍청이 같았다. 그럴 마음 없는 상대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꼴이라니. 이런 서글픈 자기기만이 있나. ‘어떻게 지내니,’라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대화 속에서 나는 몇 번이고 찍지 못한 마침표를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이해를 갈구하며 살고 싶지 않다. 덩달아 누군가에게 이해를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삶이 계속 불친절해도 나는 그냥 이대로 거칠고 투박하게 살아갈 것이다. 명명해서 만들어진 마음은 명명했다는 이유만으로 맹목적인 믿음을 준다. 명명했던 것을 거둬들이고 슬픔 속에 놓이고 보니 참담한 마음과는 별개로 맑아지는 생각이 있다. 맹목적인 믿음에 가려진 상대의 진심. 상대의 존재가치, 상대에 대한 애정… 애초에 명명이 제멋대로였으니 결국엔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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