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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봄여기 Jul 19. 2021

모든 사람은 혼자이면서 타인이다

<모든 사람은 혼자다>에서 얻은 감상을 위주로_견딤의 기록2

세상의 어떤 한 구석도 그에게 할당된 것은 없다고 느낀다. 즉 그는 도처에서 잉여인 것이다. 그가 채워야 할 자리가 그를 기다리며 하나의 부재로서 미리 움푹하게 패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우선 그리로 왔다. 부재는 현존에 선행하지 않는다. 무無에 앞서 존재가 있다. 그리고 존재의 한가운데에 공허와 결핍이 출현하는 것은 다만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다.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꼴리아>는 세상 종말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우울증의 가장 극단적이고 신경증적인 현상이 잘 드러난 영화다. 극 중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은 자신의 앞에 놓인 미래에 어떤 희망도, 이유도 찾지 못해 극심한 우울을 겪는다. 그녀의 언니 클레어(샤를로뜨 갱스부르)는 앞으로 성장할 아이가 있고, 사랑하는 남편이 있으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인물이다. 지구를 멸망시킬 소행성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죽음을 갈망하던 저스틴의 우울은 점차 환희로 바뀌어가고 삶을 추구하던 클레어는 현실을 부정하며 히스테릭해져 간다. 돌봄 받는 자(우울증 환자)와 돌보는 자(정상인)의 관계는 종말 곧 '존재의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전복된다. 지구가 산산조각 나서 먼지처럼 사라진 우주의 광활한 어둠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완벽한 존재의 소멸 앞에서 '나의 선택'이 아닌 절대적인 이유로의 멸절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상의 종말을 환희로 가득 찬 얼굴로 받아들인 저스틴을 그래서 나는 너무 공감했고 이해했다. 세상의 종말보다 앞으로 다가올 내일이, 언제 끝날지 모를 오늘과 같은 무수히 많은 내일이 나는 언제부터 두려웠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인 것 같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다가올 '내일'을 기대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좋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사라지는 빛이 아쉬워 골목 사이를 목적 없이 거닐곤 했다. 돌아갈 집이 평탄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내일이 오늘보다 좋을 것이라는 '희망'과 '긍정'의 감정을 가져보지 못했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런 감정은 배우는 것일까, 아니면 저절로 느껴지는 것일까,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일까.


사람은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기투(企投)이다. 인간 존재는 기투의 형태 하에서 실존하고 있지만, 그 기투는 죽음을 향한 기투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목표를 향한 기투이다.


보부아르는 <모든 사람은 혼자다>에서 "인간은 채워질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어떤 목표에 도달한 인간은 다른 목표가 생길 때까지 권태에 시달린다. 어떤 목표에 도달했다고 해서 만족과 충만함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표에 대한 욕망을 기획함으로써 끊임없이 미래로 기투(企投, 매 순간 미래로 자신을 내던지는 존재방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미래를 향해 내달리는 존재라면 인간의 행복 또한 "기획"일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서 나만의 장소를 찾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가지는 것은 내가 속한 세계와의 유대감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미래로 기투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때때로 나는 나의 자리를 잃는다. 삶의 목표를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것에 회의를 느낀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 세계에 나의 자리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인간이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하나의 여건"이 되어줌으로써 "자기 위치를 정하는 것"이라고 보부아르는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타인과의 약간의 스침도 버겁다. 매일 아침 출근 만원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분노를 느낀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여건이 되고, 서로의 위치를 잡아줌으로써 연대관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확히는 그런 연대관계가 없기 때문에 나는 괴롭다.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고, 사람들에 대한 이 무차별적인 증오와 반감이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타인이 나를 운반하여 끝없는 생성生成 저쪽 멀리까지 데려가 줄 것이라고 희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인간은 어떤 행위도 무한히 확대되지 않는다. 타인이 나를 출발점으로 하여 창조해 내는 것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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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한하다. 나는 자신의 종말을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추월되지 않는 목적, 참으로 목적인 목적을 선택하는 일이다.

나는 스스로도 어쩔  없는 공허와 결핍에 놓여있다. 사람을 사랑할  없으니 기대할 미래가 없다. 기대하지 않는 미래에는 여전히 '혼자' 내가 지금보다 늙고 나약한 모습으로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부재를 상실로 경험할 뿐이다. 나는 타인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러므로 보부아르의  말은 시리게 가슴에  박힌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아닌  알았지만 사실 지금까지도 폐허 같은  공허와 결핍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줄 타인을 기다린다. 내가 원하는 위로와 사랑을 주기를, 언제 어디서든  뒤에  있기를,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를 받아주길 기대한다. 매번 이런 기대는 '완성' 적이 없기에 '미래' 희망적일  없다. 미래에는 더욱더 나이 들고 늙고  빠진 내가 있고, 어렸을 때와 같은 이유로 약하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없을 상황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나를 잠식한  오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나는 계속해서 실망하고, 나를 생성의 길로 인도할 존재를 기다리다 결국 혼자인 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두렵다.


두려운 것을 두렵다고 말하고 보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요 근래 나를 온전히 나로서 "하나의 충만한 객체"로 인지해본 적이 없다. 보부아르는 인간은 혼자서 절대 스스로를 대상화하여 충만함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하나의 대상으로 "충만한 객체"가 되기 위해선 타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계속해서 타인을 증오하고 사람을 멀리하게 될지 아직은 어떤 결정도 대답도 내릴 수 없다. 지금은 그저 타인과의 연대를 끊지 않고, 이 세계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우울의 근원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에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뿐이라는 사실만 명확하다.


#모든사람은혼자다 #시몬드보부아르 #꾸리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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