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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스 Jan 01. 2018

1987, 싸워서 얻어야만 했던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고작 중학생인 내가 듣기에도 말이 안되는 이상한 죽음이었지만 어른들은 기껏 공부하라고 대학보냈더니 데모나 한다고, 서울대까지 보냈는데 저리 죽었으니 부모는 오죽 속상하겠느냐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했던 1987년이다.


그렇게 나는 그 해의 투쟁을 잊고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을 바라보며 행여 실수하진 않을지 가슴 졸였고 금메달 사냥을 하는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을 즐겼다. 그리고 조금은 덜 투쟁적이지만 수험생활이라는 나만의 전투를 치뤘다.


학교이름이 새겨진 가방을 메고 화일을 품에 안고 자랑스럽게 시작한 나의 대학생활은 나만의 투쟁에서 내가 싸워 얻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입생 시절의 나는 4.19 떼지어 달리기는 무엇이며 무슨 무슨 열사 노제가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북부총련 회장이라는 모 선배는 제적을 당했다는데 게다가 수배중이라고도 했다. 요즘같은 세상에 무슨 이슈가 있다고 학업을 뒤로 하고 명분없는 투쟁을 하는지 당시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80년대 끝자락 학번 선배들은 우리들을 보며 요즘 것들은 신세대니 X세대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고 그들의 후배들이 더이상 열렬히 투쟁하지 않음을 개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무슨 무슨 열사라 했던 그 이름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박종철이었고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 이한열이었다. 새해 첫 날 아침, 그들을 극장에서 다시 만났다.


1994년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연세대학교 사건이 일어나고 친한 동기 몇몇과 나는 학교를 찾았다. 연대를 덮쳤으니 다음은 우리 학교 아니겠냐며 학교를 지키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학교 정문에 이르기도 전에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검문하기 위해 경찰인지 군인인지 모를 우리 또래 젊은이들이 열을 지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너머 선배들과 몇몇 동기들은 불법 검문을 중지하라며 또다른 열을 지어 대치하고 있었다.


가방에 불온서적이 있을리 없었고 형식적으로나마 가방안을 보여 주면 통과될 것이 분명했지만 타당한 사유없이 그저 학교에 진입한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을 불심검문하는 것은 엄연히 위법임을, 적어도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가르쳤음을 떠올리고 나니 괜시리 마음이 요동쳤다.


내 안에서 나의 작은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검문을 요구하는 젊은이들 너머로 검문에 응하지 말라고 외치는 동지들이 보였다. 갑자기 용기가 난 것일까? 나는 그들에게 나를 검문하려는사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영장이 있느냐 따진 것도 같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학교진입을 하지 못하도록 나를 막아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젊은이들 틈으로 손들이 뻗어 나왔고 그 손들은 나를 학교쪽으로 잡아당겼다. 한참의 실랑이 후 나는 검문에 응하지 않고도 학교에 진입할 수 있었다. 과방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어쩐지 열기가 쉬이 식지 않아 상기된 모습 그대로였다. 뜨거운 여름이었기 때문일까?


뜨거웠기로서니 1987년만큼 뜨거웠을까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목숨과 맞바꿔 싸워 얻어 준 선배들의 함성만큼 뜨거웠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가 감동적이긴 하지만 온전히 퍼즐을 맞추지 못하는 딸들에게 체육관 선거라 하는 간선제가 무엇인지 스크린 안에서 외치던 호헌철폐는 무엇인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국어 어휘가 능숙하지 않은 딸들이 되물었다.


쟁취가 뭐에요?
싸워서 얻어낸다는 거야...
저분들이 싸워서 얻은 것이
바로 우리의 한 표고 촛불의 밑거름이야


엄마가 시카고로, 헬싱키로, 헤이그로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나서는 것은 그분들이 싸워 얻어 주신 귀한 한 표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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