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장애 등급 외 처분 행정심판
나는 이렇게 사회인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주는 것을 행복하게 지켜보는 엄마로 나이들어 갈 것인가
일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핀란드로 이주하면서부터 고민했던 문제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엄마로서의 나도 나쁘지 않았고 가끔씩 보람도 느낄 수 있어 일을 그만두고 선택한 그 시간들이 소중하게 여겨졌지만 마음 한 구석의 갈증은 해갈되지 않더군요.
그러던중 약촌오거리재심판결을 이끌어 낸 박영준변호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슴이 요동쳤습니다. 비록 대단치 않지만 내가 쌓아온 지식기반에 나의 열정을 보태어 누군가의 인생에, 누군가의 삶에 빛을 비출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누군가는 종교적 실천으로 또 누군가는 가진 것을 내어 놓아 나누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좀더 따뜻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고 한국에 돌아온 뒤 이를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공부와 일을 쉰 시간이 길어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고 또 그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지 반년 쯤 지나자 이의신청이나 행정심판 등을 통해 제가 도왔던 분들의 인용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리하고 여행하며 사색하며 여유로운 삶의 일부를 나누었던 공간에서 이렇게 결이 다른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을지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은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나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늦은 밤 문자가 왔습니다. 일을 시작하면서 사실관계를 분석하고 법리를 살펴 서면을 작성하는 일말고 의뢰인들의 무차별적인 컨택이 사생활의 경계를 무너뜨려 스트레스가 많았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휴일이나 너무 늦은 시각 핸드폰에 알림이 뜨면 한숨부터 쉬곤 했습니다.
희귀질환으로 안면조직일부가 성장을 하지 아니하여 자라면서 안면의 변형이 시작된 자녀분의 아버님이 보내오신 문자였습니다. 늦은 시각이라 전화는 못드리고 우선 문자드린다며 연락을 주셨던 것인데 이분의 아드님이 장애등급신청을 하였으나 등급외 판정이 나오고 이의신청을 하였음에도 판정이 번복되지 아니하여 저와 상담을 하시게 된 경우입니다.
우리 법령에서는 다양한 장애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등급기준을 마련하여 장애를 판정하는데 현실 속 다양한 질병과 그로 인한 어려움을 몇 줄의 기준으로 다 반영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장애로 인한 어려움이 극심함에도 장애로 판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이런 경우 절차에 따라 재판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다만 질병으로 인한 어려움이 크다, 힘들다, 도와달라는 형식으로 읍소해서는 판정을 번복하기 어렵습니다. 사법제도이기 때문에 법적 논리에 따라 본 처분이 부당하다는 것을 밝혀야 하고 이때문에 법률 조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얘가 직장이라도 있어야 밥은 먹고 살쟎아요.
그런데 얘 보세요.
일반인들하고 경쟁해서 직장 못구해요. 장애판정이라도 받아야 장애인고용이라도 기대해 보지 않겠어요.
다른 거 다 필요없어요.
아픈건 이미 어쩔 수 없쟎아요.
왜 우리애만 이런 병에 걸렸나 원망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원망해 무얼하겠어요.
장애등급이라도 받아서 우리 없어도 나라가 좀 얘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줬음 좋겠어요.
심판청구서를 쓰고 두 번의 답변서를 쓰는 동안 이분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부모의 마음으로 정성껏 작업했습니다. 하늘이 도왔는지 이분들과 저의 정성이 닿았는지 인용판결이 내려졌고 이분들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인생의 큰 짐 하나를 해결하니 이렇게 기쁘다고 하시며 감사와 공을 제게 돌리십니다.
하지만 어찌 이게 저의 공일까요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고 수많은 수술과 치료를 거듭하고서도 남들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했을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마지막 희망으로 신청한 장애등급마저 등급외로 나왔을 때 절망감이 어땠을까요
이런 분들의 절실함에 저의 보잘 것 없는 힘을 슬쩍 얹은 것이 마지막 한 방울 낙숫물에 수많은 세월 문을 두드렸던 낙숫물이 만들어 놓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큰 바위를 깨뜨리는 것처럼 좋은 결과를 만든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