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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14th

남은 반백년, 행복하게 살고 싶다.

by Someone


둘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던 3월이다. 학급회장선거가 있었고 아이도 당선되어 남녀회장부회장 4인이 결정되면서 아이들의 엄마4인 역시 한 그룹을 형성하였다.


학년초, 학기초에는 할 일들이 많다. 게다가 이곳은 대치동 한복판이다. 한국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 오자마자 공부하고 합격해서 일을 막 시작하려던 시기의 나지만 엄마들이 참여해야 하는 학교일을 영 모른 척만 할 수만은 없었다. 임원맘은 더더군다나 앞장 서야 한다.


그녀들과의 첫만남은 자녀가 임원이라서 관례대로 만들어지는 자리들을 함께 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중에서 마음이 맞거나 좀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있는 법이라, 중1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지금도 종종 만난다.


아이들이 어리면 하교시간 전에 마칠 수 있는 브런치 모임이 주가 되지만 다 큰 아이들을 두고 있다 보면 저녁 술자리가 주가 된다. 게다가 나처럼 일하는 엄마가 끼어 있으면 더욱 그렇다.



나를 포함 외동이건 막내건 모든 자녀가 성인이 된 네 명의 여인들이다. 대입을 마무리한 대치맘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갱년기와 빈둥지증후군이다.


이십년 넘게 산 남편이야, 십년씩 사용하는 냉장고나 빌트인가구같이 익숙하지만 설렘을 주는 존재는 아닐 것이고 우리 역시 그들에게 그러하니 교육을 위해 품에 품고 있던 자녀의 입시가 마무리되면 사실상 우리들의 마음은 빈 둥지처럼 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남은 반백년을 어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옵션들이 별로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옵션들의 내용이 썩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노후걱정도 없고 자녀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명문대에 진학한 어머님들은 저마다의 사연이야 다 있고 힘든 일들을 겪고 있지만 이제는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속의 속삭임을 느끼게 된다.


저들에 비해 강남사모님소리를 듣기에는 많이 다른 나지만 이런 속삭임이 귀를 간지럽히고 머리를 멍하게 하고 결국 몸을 아프게 하는 일을 겪었다. 그리고 그 속삭임은 여전히 나에게 이야기한다. 행복하고 싶지 않냐고


나이들어 노인이 되어서도 무언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항가는 길 여주인공이 이야기한 미풍, 산책같은 사람과 함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이 남편이 될지, 새로 사귄 노인친구가 될지, 오랜 지인 중 하나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랑 할 수 있길 바라며 무얼 할지 고민해 보았다.


노인이 되면 체력이나 건강이 지금과는 다를 것이므로 체력이 많이 필요치 않으면서 뇌는 좀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준비물이나 장비가 거창한 것도 피하고 싶다. 뺀드르르한 수영모자를 쓰고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다 샤워하고 돌아오고 어떤 날은 노래교실을 가는 그런 할머니말고 다른 할머니가 되고 싶어 고민, 고민을 하다가 찾아 낸 것이 드로잉과 바둑이다.


예체능은 잼병이라 여기며 살았지만 선생님을 회의실로 모셔 일하는 시간 중간중간을 쪼게 개인레슨을 받다보니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게끔 끄적거릴 수 있게 되었다. 필기구와 종이만 있으면 되니 참으로 좋다.


그런데 이건 혼자하는 거쟎아…


나이가 엄청 많이 들어서 그때 너랑 산책하는 상상만 해도 나는 너무 좋다고 말해 준 이를 떠올려봤다. 미풍같은 산책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중 하나이긴 하다.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바둑을 두며 바둑을 익힌 그는 머리도 꽤나 좋아 일찌감치 동네 어른들보다 잘 두게 되었다고 했다. 90년대초중반까지도 대학에는 과방이라는 것이 있었고 오가다 들르면 마주 않아 바둑을 두는 둘과 주변에서 이를 구경하는 무리가 늘 있었다. 그 역시 바둑을 두곤 했다.


산책도 좋은데 허구헌날 산책만 하면 무릎나간다. 바둑도 같이 두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주변 바둑학원을 검색해 보았고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를 이길 만큼 혹은 비등하게 둘 만큼 실력이 되기는 어렵겠지만여러집 접고 놀림받으며 한 두판 둘만큼이라도 배워두면 좋을 것 같더라고


바둑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금방금방 늘었다.


오가는 길에 보니 승부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조훈현기사와 이창호기사의 이야기라 했다. 나를 바둑배우는 일로 이끈 그는 이창호기사를 엄청 좋아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승부 볼래?

어? 그래~ 아! 그런데 얼핏 보니 바둑에 관심없는 사람은 지루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괜찮겠어?

응, 나 바둑 배웠쟎아, 꽤 늘었어. 그리고 조훈현, 이창훈 모르는 사람 어디있어.

그래, 보자. 난 너 지루할까봐 물어봤지


영화는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재미있었고 유아인배우의 연기는 정말 인상깊었다. 사람이 자기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개인적인 이슈로 연기생활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듯한데 넷플릭스에 승부가 올라와 있더라. 엄청 빨리 간판을 내렸나보네. 사람들은 재미없어했나..?


모를 일이다.


난 여전히 남은 반백년을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애를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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