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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ree Baik 애리백 Feb 09. 2020

제2화 혼란 속에서 그가 몹시 바랐던 것은

지혜를 나누어주는 사람 H 씨

“그때 나는 미친 듯이 여행을 했어. 혼자서 짐을 챙기고 가방을 들고 이곳을 떠나기를 반복했어. 처음 가보는 미지의 세계에서 몸을 뉘었어. 그리고는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몸을 혹사시킬 정도의 매우 강도 높은 운동을 했어. 몸이 부서질 때까지. 나는 어떻게든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시도했어. 널뛰는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는 우울증 약을 먹었고, 대중 앞에서 자신감 있게 연설하는 법에 대해 배우고 사람들 앞에서 직접 시뮬레이션을 수없이 반복하는 워크숍에도 가봤고, 자기 치유에 관한 책을 미친 듯이 사서 읽어댔지. 중국 무술을 배웠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고 싶어서 무진장 애를 썼어.”


그의 나이가 4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심리적인 위기감을 겪었다. ‘내 인생은 결국 이런 방식으로 실패가 되었구나.’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운 마음, 당혹스러운 마음은 한번 그의 가슴속에 꽂히고 다시는 그 안에서 탈출하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그에게 벌어졌을까.


나는 H가 잔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고 지금 나와 함께 한 자리에서 처음으로 꺼내져 나오는 그의 이야기들에 나는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무지는 이번에 여실히 탄로 났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나는 이해받지 못했으니까.”


그의 서술을 들으며 내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스쳤다. 차마 묻지 못하는 질문들이 차례차례 쌓였다.

‘왜 그는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을까. 왜 그는 혼자라는 생각을 했을까. 왜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까. 왜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스스로 처절하게 외롭기를 선택했을까.’

그 이유에 대해 나는 곧 알게 된다.  


그가 20대 중반 국제기구로부터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 그는 결정을 해야 했다. 연인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그녀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함께 스위스로 가고 싶었다. 말레이시아에 계신 부모님이 격하게 반대하는 결혼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성급히 내린 결론에 대해 어른들은 적극적으로 우려를 내비쳤지만 그의 선택지에는 다른 보기가 없었다. 새롭게 정착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배우자와 함께 새 가구를 고르고, 함께 할 집을 마련하고, 현지 언어를 배워가며 새로운 환경에 마냥 즐거워했지만 이 행복감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처지에서 겪어야 했던 결혼과 연이은 이혼이었다. 참담했다.


H는 이 사연은 “실패”라고 불렀다. 부모님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부모가 그를 향해 최대한 적극적으로 표시한다 혹 감은 그를 기저에서 괴롭혔다. 이미 헤어진 배우자와는 자그마치 8년 동안 법적인 혼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왜? 이혼 과정이 쉽지 않았던 거야?” 묻는 내게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니, 점차 시간이 흘러서 서로 각자의 연인이 생겼는데도 법적인 부부 관계를 지속해야 했어. 서류상으로만 부부였던 거지. 왜냐면 내가 그녀의 법적 체류 근거였거든. 그러니까 나와 남남이 된다면 그녀는 스위스 체류증을 반납하고 이 나라를 떠나야 해. 그녀는 이미 일자리를 찾아서 수입도 있었지만 말이야. 알잖아, 스위스 이민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같이 거주하던 아파트의 명의를 이전하지도 못하고 때마다 날아오는 우편물 주소지도 분리하지 못한 채 H는 혼자의 삶을 감당했다. 개인주의적인 성정이 큰 그가 결정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자신을 따라 말레이시아를 떠나 이 멀리 스위스에 함께 온 그녀이지 않은가. 헤어진 배우자를 돕는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택한 이혼 유예기간이 무려 8년이나 되었다니, 이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의 수습은 혼자였다. 어린 나이에 이혼을 겪으면서 그는 실패한 결혼 생활에 대한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았다. 자신은 정상 가족을 만들지 못했기에 부모에게 떳떳하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책이었다. 추운 겨울날 지붕의 처마 밑에 달려있던 거대한 고드름이 이제는 너무 무거워진 나머지 아예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린 것처럼. 마음이 송두리째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와 내가 동시에 갖는 ‘강박’의 깊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혼 후 누구보다 상심이 컸을 사람은 그 자신이다. 상실은 아무리 반복해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그는 주변의 실망감과 책망까지 받아 안아야 했다. 그가 가장 힘들었을 시기에 가까운 존재들에게서 위로를 받지 못했고, 이해받지 못했고, 공감받지 못했기에 앞으로는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일절 입을 다물기로 한 것이다.


기준치와 기대감이 높은 엄격한 아시아 부모의 자녀들은 마찬가지의 딜레마가 있다고, 내가 그걸 알기에 H의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고.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부모로부터의 ‘심리적 독립’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참았다. 몇 년을 뛰어넘어 그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H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이 치솟기 시작했다. 큰 우울증이 찾아왔고, 삶에 대한 의욕이 떨어졌고 동시에 스스로에게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주변에서는 그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웃으며 동료들과 일을 진행했고 아무도 이상한 낌새를 몰랐다.


그는 물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대로 익사하는 걸까. 지금껏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매일 그를 괴롭혔고 매 순간 어두운 마음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일이 발생했다.


큰 컨퍼런스가 시작되어 국제기구 사무국이 무척 바쁘던 어느 날이었다. 세션이 시작되었다. 의장의 발언이 끝나고 회원국으로부터 H의 부서 특정 프로젝트에 대한 상세 질문을 받게 되었다. 3천 명 규모의 대형 컨퍼런스였다. 모든 동료들과 그의 보스와 유엔 회원국 대표단들이 참석을 한 중차대한 자리에서 질문을 받은 그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답변을 하지 못했다. 사방의 둘레가 오로지 고요했다. 모든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횡설수설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말을 하려고 할수록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몸에 오한이 오기 시작했다. H의 앞에는 여전히 마이크가 켜져 있는 상태였다. 동료들은 쩔쩔매는 그를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상황이 매우 안 좋았어. 나는 갑자기 군중 앞에 선 바보가 되었지.”


나는 그 순간 너무나도 놀란 마음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조리 있고 논리적인 그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떤 괴로움이 소용돌이치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꽁꽁 가리고 있던 그가 별안간 광장 공포를 겪게 되다니. 공개적인 자리에서 겪은 최악의 상황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고 트라우마를 남겼다.


“모든 게 최악이었어. 다 헝클어져버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어. 나는 자신감을 전부 잃었고, 자존감이 바닥을 쳤어. 나아질 방법도 없고 약도 들지 않았어. 명상을 해도 불안증은 없어지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에너지 고갈상태였지만 방법이 없잖아..”


부모님도 누나도, 가까운 친구들도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려움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인에게 어렵게 얘기를 꺼냈지만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네가 겪는 우울증은 네 머릿속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그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지금까지 이야기를 풀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에 조금 쓸쓸한 기분이 스며 나왔다. “나는 그저 공감을 바란 것뿐이었어.”


이상하게도 나는 이 말 한마디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힘든 일을 겪을 때 그가 보여준 모습이 이토록 어두운 혼란 속에서 나온 소중한 결론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깜깜한 골목을 혼자 용기 있게 지나온 그가 하염없이 고마운 것이었다. 한참 전 그가 내게 했던 한 마디가 기억났다. 너 자신에게 숨 쉴 틈을 허용하라는. 그의 말을 그 당시 내가 이해할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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