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나누어 주는 사람 H 씨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는 방식은 자기 본연의 색깔에 따라 상이하겠지만 과정은 마찬가지로 상처가 가득하고 길고도 암담하다. 그 지난한 일은 마치 건축물을 한 층 한 층 쌓아가는 것처럼 도대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막막하기만 한 매일을 견디며 지속하는 방법밖에 없다.
심리적인 영향뿐 아니라 사회적 타격을 입은 H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들을 시도했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었고, 혼자 여행을 다녔고, 심리 서적을 읽었고,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그때를 회상하며 H는 내게 말했다.
“에너지는 두 방향으로 나뉠 수 있을 것 같아. 긍정적인 방향과 부정적인 방향, 어느 쪽으로 내 마음과 시선을 머물게 할지는 본인의 자유야, 나는 돌파구를 찾고 싶었기 때문에 방향에 어울리는 선택하기로 했어.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은 나의 독립적인 긍정성 말이야. 내 마음속에 놓인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최대한 통제하기로, 그걸 훈련해보기로 했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열심히 펜을 쥐고 인터뷰 노트에 받아 적고 있던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집중하고 있던 나를 향해 그가 한 박자 쉬고, 곧이어 중요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겠지.”
여전히 노트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그는 이미 다음번을 준비하고 있구나. 맞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H는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여러 일들은 사소한 이유로 틀어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피곤하거나 잠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아, 이제야 기억이 났다. 한참 전의 일이 느슨한 연결고리처럼 떠올랐다. 함께 회사 카페테리아 앉아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커피 한 잔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요즘 참을성이 현저히 떨어졌으며 동료들한테 실망하는 일이 적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는 뜬금없이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이며 시퍼렇게 멍이 든 자국을 보여주었다. ‘이 많은 멍은 대체 뭐지?’ 의아한 마음을 품으며 그를 쳐다봤을 때였다. “이번 주에 에드문드랑 쿵후 대련해서 맞은 멍이야. 영광의 상처지. 아픈데도 자랑스러워. 일주일이 지나서 흔적이 많이 없어진 게 이 정도야.”
에드문드는 H와 함께 회사 내 쿵후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는 무려 홍콩 출신의 아마추어 무술인이다. 머리숱이 없는 것만 빼면 최소 주성치 몸매에 날렵하고 날카로운 이소룡의 눈빛을 겸비한 인물인데 그와 함께 쿵후를 연마하며 H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조용히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이후로 이따금씩 H는 내게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다. ‘요즘 잠 잘 자고 있니, 충분히? 운동은 하기로 했어? 캔이나 박스에 들어있는 음식을 줄이는 것도 도움이 되지. 가공 음식과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들.’ 내가 지난번에 그에게 털어놓았던 고민과 연관이 된 문자 메시지였다. 한 번 화가 나면 며칠이나 불쾌한 상태가 지속되고 단시간에 살이 많이 쪄서 매우 슬프다는 이야기를 했던 걸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후 그는 카카오 함량 72%에 달하는 Movenpick Swiss 초콜릿을 사서 내게 주고 가기도 했다. 나라면 매장에서 절대 집어 들어 올리지 않을 물건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고, 뒷등으로도 듣지 않을 잔소리 대신 대안을 자꾸만 보여주고 있었다. 나도 고집이라면 뒤지지 않는다. 코웃음을 쳤다. "초콜릿을 왜 먹는데! 초콜릿은 끔찍하게 단 맛에 먹는 거 아니겠어? 초콜릿의 본질을 배반하지 말아 줘."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나에게 한 번이라도 맛보라고. 블랙은 얼마나 진하고 맛있는지.
그러고 보니, 내게도 자연스럽게 전달되어 흘러들어온 그의 기질와 회복력은 융해되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무심코 말했던 그의 메시지들을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느 순간 한 가지씩 실행하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그랬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꼬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걷어내고, 영양소를 생각하며 따뜻한 음식을 챙겨 먹고,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더 많이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필경 이전과 다른 변화다. 편안함과 자신감의 원천을 스스로 알아내고 일종의 긍정 순환의 치료법을 고안해내도록 조력한 H의 도움은 내게 빈틈없이 적중했다. 생활이 유연해지기 시작했다.
“두꺼운 옷들이 필요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창문을 활짝 열고 대청소를 하잖아. 우리도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를 정기적으로 돌아보고 정리할 필요가 있어. 어디서 읽었는데 그러더라.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친구는 딱 다섯 명이라고.”
지난 여름 그와 호숫가에 앉아 이야기를 했던 날이 떠올랐다. 너의 이야기를 공감한다고 충분히 표시를 한 뒤 그가 덧붙였던 말이다. 이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스스로 약한 존재라 자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람은 애쓰는 존재야. 그걸 타인이 알아봐 주길 원하고 인정받고 싶은 게 당연해.”
그는 recognition과 appreciation이라는 표현을 썼다. 나는 그 두 단어를 많은 일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타인의 공력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주변인의 인정받기 위해 꾸역꾸역 하던 일들을 내려놓았다. 도중에는 내 마음속에 끝없이 갈등이 일었고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고 싶은 마음과 충돌했다. "내가 어려웠을 때 도움을 준사람들을 정리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야.”
지금도 오래 인연을 이어온 인물들을 단칼에 정리하는 것에 주저하는 내게 그는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코팅이 다 벗겨져 나간 프라이팬, 오래되어서 다 헤지고 냄새나는 양말 같은 것들을 긴 시간을 간직해서 정들었다고 계속 옆에 두고 지내지 않잖아. 그 세월이 아깝다고 하는만큼 너도 이미 알고 있어.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걸. 매번 불평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 감정을 혼자서만 간직하는 법이 없어. 수동적 공격성을 띄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편한 마음을 너에게 반드시 끼얹어놓고 말아. 봐, 이번에도 죄책감을 줬잖아.”
그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쿵후 동호회를 맡으며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배워가며, 스트레스를 덜어내고, 그와 동시에 많은 동료들과 연결되어 사회적인 교류를 하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 서서히 자신감을 충전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 H와의 인터뷰는 그의 바쁜 스케줄로 여러 차례 미룬 뒤에 이루어졌다. 몇 주 전 미리 배경 설명을 마친 후 인터뷰어 동료를 섭외하고 시간과 장소를 앞서 확정하는 지금까지의 인터뷰와는 달리 오늘 당일 결정이 된 유일한 인터뷰였다. 한 번은 여름휴가 때문에 또 한 번은 중국 무술 워크숍 일정으로 미뤄졌다. 그동안 그는 인터뷰를 저어하기도 했다. 자신은 그리 대단한 인생 구력이 있지 않다고,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 난민 출신도 아니고 가족을 잃거나 큰 재산 소실이 있던 것도 아니라고. 크게 내세울 성공담이 있지도 않다고.
하지만 나는 H를 설득했다. “너는 내게 지혜를 나누어준 사람이야. 무너지기 쉬운 매일을 지탱하기 위해, 내면의 힘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듣고 싶어. 커피는 네가 원하는 것으로 미리 주문하면 내가 테이크 어웨이 해갈게, 뭘 원해? 카푸치노 아니면 에스프레소?”
결국 오늘 인터뷰를 무사히 마치고 그는 어김없이 농담을 했다.
“네가 이렇게 조용히 필기까지 받아 적으며 오롯이 내 얘기를 두 시간 동안 들은 게 완전히 처음인 것 같은데? 최초의 사건이다. 거의 매번 내가 경청하는 역할이잖아?”
“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오늘만 그 기분을 충분히 만끽하도록 해. 다음번엔 국물도 없어. 네버 어게인.”
“아쉽다. 다섯 번으로 나눠서 인터뷰하겠다고 할 걸.”
그의 고유한 이야기 속에 나의 스토리를 더불어 풀어놓게 해 준 그가 고마웠다. H의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며 나는 문득 감격스러운 마음이 들어 곧장 H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도 정리 대상이 될 뻔했는데 살아남아서 다행이야. 냄새나는 오래된 양말 취급해주지 않아서 고맙다.”
단번에 답변이 왔다. “무슨 소리야. 나는 너랑 얘기하는 동안 즐거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