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감을 느낄 미래의 어느 순간 꺼내어 볼 경험
프로젝트 펀드레이징을 위해 종종 글을 썼다. 뉴스레터에 실린 소식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인쇄되어 전 세계 지부에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각 나라마다 번역을 자원한 동료들이 있었다. 주로 은퇴한 할머니들, 할아버지들이다. 전 세계에 포진한 회원들은 제네바 본부 사무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매우 흥미롭게 지켜봤다. 또 본부 사무실을 방문해보고 싶어 하는 회원들도 많았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신입 활동가로서 작은 기쁨을 소소하게나마 전하고 싶었다. 영어로 에세이를 쓰면 제임스가 내 글을 검토하고 윤문을 해주었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나의 역할이었기에 열심히 지속했다. 한번은 본부 사무실 복도에 전시된 커다 란 퀼트 작품에 대해 소개했다.
노르웨이의 커뮤니티에서 협동 작업으로 한 땀 한 땀 만든 이 컬러풀한 퀼트는 약 9년 전 기증받은 귀한 작품입니다. 퀼트 한 칸을 차지하는 직경 12센티미터의 네모 칸에는 그동안 본부를 다녀간 수많은 사람의 서명이 적혀 있습니다. 후원자의 이름을 적을 수 있도록 퀼트 한 칸을 내어주는 것은 그날 배고픈 이들을 생각하며 후원자가 금식하는 비용으로 펀드에 100달러를 기부하는 아름다운 행동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부 사무실에 방문객이 올 때나 이사회 회의를 참석하기 위해 멤버들이 올 때 저는 사무실 복도에 걸린 이 퀼트 작품을 꼭 소개합니다. 이윽고 연대의 표시로 퀼트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얼른 우리는 벽에 전시된 커다란 퀼트를 떼어내 땅에 끌리지 않도록 소중하게 다루며 회의 테이블에 펼쳐놓습니다. 그들은 신중하게 서명하고 우리는 감사한 마음을 받지요. 모인 금액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육 기금으로 적립이 됩니다. ‘Time of Fast금식의 시간’이라는 이름의 기금입니다.
뉴스레터의 글을 마치며 소회를 덧붙였다.
멋진 작품을 통해 지난 9년간 방문객의 역사를 한눈에 이야기해주는 이 퀼트가 제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칸씩의 몫을 하며 꼼꼼한 바느질을 통해 옆으로 위아래로 한 칸씩 이어져 서로의 역할을 지탱하면서 아름다운 퀼트를 함께 채워간 다는 것을요. 며칠 전 다시 세어본 퀼트 작품의 아담한 네모 칸들은 어느덧 거의 채워져 현재 여덟 칸만 남아 있습니다. 곧 있으면 뿌듯한 매진입니다.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되었다. 곧이어 에디터가 뉴스레터를 발행했다.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로 뿌려졌다. 얼마 뒤 다음 뉴스레터에 전할 에피소드를 찾으며 다시 소재 헌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노르웨이에서 이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9년 전 퀼트를 기증한 노르웨이의 커뮤니티에서 글을 읽고 모두들 감명받았으며 곧장 새로운 퀼트 제작 프로젝트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곧바로 뜻을 모아 행동했다는 후기를 전해오니 이렇게 뿌듯하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커뮤니케이션과 홍보 일이 좋았다. 그리고 글을 통 해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매번 그걸 영어로 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적어 내려간 글들은 어김없이 제임스의 손에 새빨갛게 수정되어 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실수가 많고 의도와 반대로 쓴 표현들이 빨간 펜으로 지워져 있었다. 크게 숨을 쉬고 다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직접 수정해야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한 차례 남의 손을 탔지만 최종 수정은 내 몫이었다.
구직을 하면서, 빨간 종이가 되어 돌아오는 나의 글을 보면서 언어에 대한 열등감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남들과 자꾸 비교하게 되었다. 기숙사 친구들 면면을 보면 모두들 인정할 만한 언어 능력자였다. 프랑스에서 온 알리시아와 스페인에서 온 안젤라만 봐도 그랬다. 벌써 유엔 공식 언어 여섯 개 국어 중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갖춘 셈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0개 국어 보유자다. 이들을 보니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유럽연합 EU 안에서 교육체계가 호환이 되니 인접 국가에 가서 유학하는 게 쉬웠고 이웃 나라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국제기구에 대한 접근성이 월등히 높았다.
실제 국제기구 통계를 보면 유럽의 참여도가 가장 높다.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기차로 세 시간이면 파리에 닿을 수 있고 열한 시간이면 바르셀로나에 도착한다. 하루 안에 오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나는 어땠나.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심지어 두 개로 쪼개져 국경을 넘으면 곧장 월북인데? 이런 조건을 하나씩 따지고 보면 고립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새삼스레 서러운 일이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는 ‘영어 모국어 화자’를 채용 조건에 명시한 공고문이 많았다. 특정 문구가 없다 해도 영어 모국 어 화자를 명백히 선호했다. 출판물 번역가와 동시통역가들 까지 합하면 영어 모국어 화자라는 조건 덕분에 영어권 채용 인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는 한국인, 아빠도 한국인,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인데. 아니, 어렸을 때 프랑스나 스페인으로 이민 왔으면 좋았잖아? 단일민족이 자랑이야? 영어 모국어 화자를 원한다는 채용 공고를 보면서 이 세상의 모든 영어 모국어 화자 들을 모조리 질투하게 되었다.
투정은 거기까지만 하고 끝내야 한다. 이제 와서 모국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충분히 잘해온 것과 값지게 얻은 것까지 부정하면 한번에 무너지는 거였다. 어떻게든 지 속해야 했다. 잘하는 것들을. 뉴스레터에 글을 쓰고 존재감을 보였다. 소식지를 읽는 전 세계의 타인과 만나는 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보람되고 기쁜 일이었다.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뒤처진다고 해도 당장 모두 그만둬야 하는 법은 없었다. 원망하고 싶은 마음과 열등감을 꾹꾹 내리누르고 잘하는 것을 꾸준히 하며 즐기는 감각을 잃지 않도록 노력했다. 토니 모리슨 의 말을 떠올리며 나의 성취에 대해 생각해 본다.
“For me, success is not a public thing. It’s a private thing. It’s when you have fewer and fewer regrets. 저에게 성공이란 공공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아주 개인적인 것입니다. 갈수록 내 자신이 후회할 만한 일이 점점 줄어드는 삶입니다.”
뭘 해도 안 될 거라는 의심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취업에 도움이 되든 말든 내가 잘하는 걸 소소하게라도 지속해야 밖에서 상처받은 자신감이 나의 내면에서 리사이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한참 뒤 어느 날 알게 된 개념, 그게 ‘자기효능감’ 이란다. 충분한 자기 충족을 경험하며 앞으로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해낼 수 있다고 느끼는 신념을 나도 모르게 연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껏 잘해왔던 것을 계속 멈추지 말고 즐겨야 한다. 그래야 좌절감을 느낄 미래의 어느 순간에 그 기억을 꺼내보며 다시 힘을 내게 된다.
[지구에서 영어생활자로 살아남는 법]
알라딘 https://url.kr/d2q9rz
예스24 https://url.kr/czrau9
교보문고 https://url.kr/pgkw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