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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ree Baik 애리백 Feb 01. 2023

어차피 우리는 전 세계 지방대 출신

나의 컴플렉스는 내면에서 서서히 국경을 넘고 있었다

한국분들이 모인 자리였다. 자녀 교육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자조적인 농담과 한탄이 흘러나왔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원대한 꿈을 안고서 서울대에 보내겠다는 결심과 기대로 서울우유만 먹이다가 취학 연령이 되고 성적표를 받기 시작하니 그 꿈이 깨져서 슬슬 연세우유로 갈아탔다가 다시 건국우유로 타협했다가, 이제는 점점 더 내려가 저~지방 우유를 먹게 되었다는 우스갯소리였다. 함께 모인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웃는 와중에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웃지 못하는 한 명이 있었다. 바로 나였다. 저~지방대를 나온 자는 그 자리에서 웃지 못했다. 사소하지만 불쾌한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내겐 학벌 콤플렉스가 생겼고 때때로 자리에 불편하게 앉아있어야 했다.


방송국을 다니며 최고 학벌의 인물들과 함께 일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게스트들은 주로 사회 저명 인사들이었다.

피디님, S대 나왔다면서요? 무슨 과예요?”

호호, 무슨 소리예요. 나 여상 나왔어요.

그때 난 황급히 편성국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며 이 말에 상처받은 사람은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리 학벌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방송국이라지만 여긴 총무부도 있고 사무직도 많다. 같은 공간에서 농담거리가 되어 거론되는 일은 불쾌하다. 누군가의 공개적인 웃음은 타인에게 비수가 된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S대를 나온 피디도 본인의 전공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는 콤플렉스가 있다.


나도 어느 때부턴가 나이를 물을 때 “몇 학번이에요?”라고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 잡지출판사를 다닐 때 새로 온 마케팅부 신입 사원과 인사하며 이 질문을 했다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저 대학 안 나왔어요.” 그 후로는 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 대학 입학 학번과 졸업장이 모두에게 기본값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에게는 대답하기 힘든 난처한 질문일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신입 사원은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았고 매번 같은 대답을 해야 했다.


학벌에 대한 열등감은 때때로 나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입시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해 몹시 바라던 서울행이 좌절되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지방 H대학교는 교수진이 좋고 학생들에게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 학교였다. 덕분에 매 학기마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았다. 학교 홍보 대사로 선발되어 코엑스 대학입시박람회에서 학교를 소개한 내가 별안간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나의 역사와 자부심을 통째로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게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 있는 거 아니겠나.


스위스 제네바 세계기상기구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학벌 딱지를 떼고 일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건만 아무도 내게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고, 혹시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의 준말)’를 나오지 않았느냐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국의 대학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전 세계 지방대 출신이었다. 고구려 대학을 나왔든 고조선 대학을 나왔든 알게 뭔가. ‘인서울’인지 아닌지 알게 뭔가. 어차피 이곳은 한국에서 발동하던 줄 세우기가 성립되지 않는 세계였다. 늘 가나다 순서로 정렬되던 규율에서 벗어나 이젠 알파벳 순서로 재조합되니 백 씨라서 출석부에 늘 중간쯤 들어갔던 내 이름이 B 씨가 되어 앞자리를 차지했다. 국경을 넘으니 표준이 바뀌었다.


어느 날은 국제기구에서 모든 구성원에게 시행하는 필수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교육 자료 각 챕터마다 인도, 필리핀 등 다양한 악센트를 가진 외국인 안내자들의 영어 내레이션이 등장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국제’기구였고 모든 차별을 엄단하며 넓은 스펙트럼의 환경에서 자라온 동료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적용했다.


영어 모국어 화자도 아니고, 아시안 여성이라는 마이너리티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 또한 분명하게 환영받는 느낌을 받았다. 빗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콤플렉스는 외부의 시선에서 시작되지만 극복은 나의 내면에서 시작된다.


그뿐 아니었다. 티타임을 하면서 얼핏 흘러나온 동료들의 스펙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기본이 옥스퍼드 대학, 스탠퍼드 대학이고 미국 항공우주국 NASA 출신도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의 대화 소재로 등장한 적이 지금껏 없었다는 게 신기한 노릇이었다. 학벌이나 출신은 서로가 궁금해하는 관심사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출신 학교 콤플렉스로 지레 위축되었던 나도 이들과 어울리며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학벌에 둔해졌다.


어김없이 아침 티타임을 함께하던 날, 디렉터도 박사들도 여전히 날씨와 과학, 정치, 시사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옆자리에 있던 한 동료가 인턴 알레시아의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파텍 필립 차고 있네요. 나도 이거 롤렉스예요. 지난번에 중국 출장 갔을 때 50달러 주고 샀어요. 오메가 시계도 하나 샀지요. 후후. 분침, 초침 아주 정확해요. 그것도 카피예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파텍 필립 정품을 사려 면 내 차를 팔아야 한다는 둥 실없는 농담을 했다. 그때 알레 시아가 대답했다. “엄마가 주신 시계예요. 할아버지가 창업자시거든요.” 옆에서 듣던 나는 놀라 자빠졌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 야? 나랑 같은 사무실을 쓰는 스물네 살의 인턴 알레시아가 손꼽히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 창업주의 외손녀였던 것이다. 왜 몰랐을까. 지난주에 이모를 따라 코피 아난 재단의 리셉션에 가게 되었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토록 자기 과시나 허세 없이 기후와 환경 이야기만 주 야장천 꺼내놓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인턴십도 날이 갈수 록 흥미로워졌다. 국제기구 인턴들의 네트워크가 구성되었고 특이하고 욕심 많은 친구들을 새로 사귀게 되었다. 여전히 생활비를 아껴쓰느라 매일 참치 통조림 하나와 샐러드가 가득 담긴 도시락을 싸서 출근했다. 스위스 시계 브랜드 창업주의 외손녀 알레시아도 마찬가지로 점심시간마다 나와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각자 싸 온 점심을 나눠 먹고 희한하고 다양한 각자의 영어 발음을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누군가를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하지 않아도 됐고 결과적으로 우리 전부가 전 세계에서 모인 ‘경계인’이며 ‘주변인’이라서. 그래서 서로의 처지에 대해 공감대가 높았구나, 그때 느꼈다. 지역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말씨가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받고 ‘인서울’ 대학을 나온 사람만 자격을 얻어 주류에 입문할 수 있다고 믿던 좁은 시야에서 나는 완전히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준이 달라진 세계를 모험하며 나 또한 스스로를 관용하는 폭이 훨씬 넓어졌다. 그러면서 나는 이전의 세계에서 서서히 졸업하고 있었다.




<지구에서 영어생활자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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