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스위스의 토요일, 가야 하는 장소가 있다

깔뱅의 존재만큼이나 놀라운 사실

by Aeree Baik 애리백

교과서를 보며 달달 외우던 서양사와 종교개혁지의 현장에 와 있다니, 갑자기 주기도문을 영어로 공부 해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 계신....’ 혹시 모르지, 나중에 주기도문을 불어로 읽어야 할 상황이 올지도. 여기는 불어 문화권이니까. ‘아, 그래서 발음이 ‘깔뱅’이구나.’


코와 턱이 뾰족한 깔뱅은 다소 고집스러워 보였다. 신기한 발견 속에서 이런저런 엉뚱한 생각들이 팝콘처럼 튀어 올라왔다.


제네바에서 목회를 한 종교개혁가이자 신학자인 그의 이름은 Calvin이라고 적혀 있었다.


벌써 막연하게 기분이 좋았다. 낯선 곳이 주는 자극이 볼을 살짝 꼬집는 것 같았다. 가을 스위스의 공기는 청정하기만 했다. 제네바의 올드 타운은 참 깨끗하고 고전적이었다. 세계사를 배우며 깔뱅의 종교개혁과 함께 외웠던 몇 가지 키워드가 떠올랐다. 청교도, 금욕주의, 종교개혁 등등. 웃음기가 전혀 없는 날카로운 인상의 깔뱅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본인의 손목시계를 조심스럽게 만지작 거리던 제임스가 내게 말했다.
“애리, 늦기 전에 장을 보러 가야 돼. 토요일은 가게들이 일찍 닫거든.”
“응? 지금이 몇 시인데?”


“5시. 토요일엔 상점들이 전부 6시에 끝나. 내일이 일요일인데 일요일은 슈퍼가 아예 문을 안 열어. 주말에 굶지 않으려면 뭘 좀 사놔야 한다구.”
“이럴 수가..”


조금은 황당했다. 깔뱅과 종교개혁의 도시 제네바의 면모를 이제야 발견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 고작 장을 보러 가야 한다니. 게다가 토요일 오후 6시에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는다니 대체 믿기지 않았다. '대관절 주말 장사를 왜 안 하는데?'

제임스와 함께 길을 돌아와 장을 보러 서둘러 대형 슈퍼마켓에 입장했다. 나는 거기서 또 한 번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된다.

종교개혁가 깔뱅의 존재만큼이나 감탄스러웠던 그 무엇, 그것은 내게 다소 시각적인 놀라움을 주었다. 슈퍼마켓의 캐셔들이 각각 본인의 자리에 앉아 바코드 기계로 물건을 계산을 하고 고객을 대하던 장면이다. 사무직 노동자와 크게 다른 근무 환경의 모습이 아니었다. 데스크를 앞에 두고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그 모습이 본인의 업무를 장악하고 있는 근로자로서 충분히 균형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비쳤다.


업무 환경에서 자신의 영역이 정확히 확보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굽신거리기는커녕 안면이 있는 고객들과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옆자리 동료들에게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한국에서 늘 쉽게 볼 수 있는, 등을 잔뜩 구부리고 서비스를 하고 있는 저자세의 서비스 노동자들과는 꽤나 다른 광경이었달까. 순서대로 차근차근 인사를 주고받으며..

바빠 죽겠는데 왜 그렇게 굼뜨냐, 왜 사람들이랑 떠드냐, 뒤에서 고함을 지른다거나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책상이 없이 이 자리 저 자리를 떠돌며 프리랜서로 일한 경험이 있기에 그 심정을 매우 잘 이해한다. 단 한 칸의 영역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의 심경을. 모두들 자신에게 주어진 책상이 있고 익숙한 자리에서 각자의 소지품을 정돈해 놓고 회사로부터 보호받으며 일할 때, 내 자리를 얻지 못 한 나는 그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사무용 전화기가 필요해 남의 책상에서 일하다가 책상 주인이 오면 의자에서 일어나 서서 통화를 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어도 움츠러든다. 이러한 직간접적 변수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태도에 의외의 영향력을 끼친다.

마트 계산원들이 물품 계산을 할 때 굳이 서서 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언가. 일을 물리적으로 어렵게 감당하도록 강요할 하등의 이유가 있는가, 앉아서 해도 무방한 일들을 일으켜 세워서.. 뭐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들 무렵 슈퍼마켓을 마감을 하느라 가드가 출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 미처 6시가 되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모두에게 주말이 허락되는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이곳은 2007년의 유럽이었다. 노동 시간과 휴일과 주말이 분명히 분리되어 있고, 직장 생활과 가정이 각자 존중을 받는 사회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 땅. 하지만 그 모두에게 지켜지는 사회적 룰을 존중하려면 나로서도 불편함을 조금씩 감수해야 했다. 이를테면 일요일 오후엔 슈퍼마켓에 우유와 식빵을 사러 갈 수 없다거나 매우 한가한 주말 거리 풍경에 꽤나 무료함이 생긴다던지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불편함에 대한 적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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