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시행착오는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고된 날들이 남겨 준 기억을 복기했다

by Aeree Baik 애리백

개최 국가는 이미 정해졌다, 덴마크로. 나는 앞으로 10개월 후에 개최할 덴마크 컨퍼런스의 총기획자가 되었다. 맡은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다년간 NGO 활동을 하며 열심히 배우고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 노하우를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컨퍼런스 기획자로서 역할은 무척이나 기대하던 일이었다. 함께 일을 할 팀을 구성하고 프로그램을 디자인해야 한다. 회사는 나를 믿어주었고 그동안의 경험을 높이 평가했다.


이 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우리 사무실에 네가 유일하다.” 제네바의 NGO 사무국으로서는 맞는 말이기도 했다. 사무국은 ‘참가자’로서 컨퍼런스에 참석한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동료들과 사무총장 롤란도의 적극적인 격려를 받으며 박차를 가했다.

대학생 시절 나는 처음 이 컨퍼런스를 참가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한국이 아시아 컨퍼런스 주최국이 되었다. 나는 한국 조직 위원회에 속하여 다시 스태프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주일간 회사에 휴가를 내고 그 일을 맡았다. 육체적으로 무척 고된 일이었다. 영어로 일하느라 두배로 고생이었다. 말을 하는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올바른 문법에 신경을 쓰느라 저녁이면 말도 못 할 만큼 피로가 몰려왔다. 매일 잠이 부족했다. 공식적인 일정 이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외국인 참가자들이 별 탈 없이 숙소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도 꼼꼼하게 살펴야 했다. 이들은 참가자이기도 하지만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협력자이기도 하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된 취침 시간이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았다. 조직 위원회에서 미리 알았더라면 일찌감치 준비할 있었던 일이 막판에 몰리게 되어 현장에서는 스태프들이 두세 배로 고생을 했다. 어딜 가나 사람이 큰 힘이다.


당시 나는 피로와 격무로 인해 매일같이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다녔다. 통증이 갈수록 심해졌다. 안구건조로 더 고생을 했다. 마지막 이틀은 착용하던 콘택트렌즈를 빼고 뿔테 안경을 쓰고 다녀야 했다. 컨퍼런스 참가자들이 나를 마주치면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너 괜찮니?’ 컨퍼런스 폐회 직후 안과 병원에 달려갔다. 의사는 내게 최소 한 달간은 콘택트 렌즈를 절대 착용하지 말라고 처방했다. 나는 당시 아시아 컨퍼런스 조직 위원회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들을 노트에 전부 기억해 놓았다. 적다 보니 길고 긴 문서가 되었다.

시행착오 불리는 표현에는 숨은 뜻이 가지 있다. 번째 기회가 분명 있다는. 드디어 때가 왔다. 한 해 뒤, 다시 한국이 세계 컨퍼런스의 개최국이 되었다. 이번에는 아시아가 아닌 세계 무대의 행사였다. 그때 나는 보고서 형식의 문서를 만들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상 이 행사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내가 겪은 그 시행착오의 경험을 극복하고 싶었다. 극복한다면 그것은완결된 과오 남지 않고시행착오 되기 때문이다. 충분히 해낼 수 있었던 일을 영영 ‘과오’로 남긴 채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었다.

기억은 선명했다. ‘조직 위원회를 구성한 팀 멤버들이 미리 만나 호흡을 맞추면 일의 진행이 한결 부드럽다’, ‘스태프들을 일일 도우미로 취급하지 말고 구성원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팀워크 시너지가 된다’, ‘단발성의 국제 컨퍼런스를 조직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NGO의 철학과 구성 그리고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스태프들에게도 주효하게 작용하는 지점이 된다’, ‘문화의 밤 cultural night 세션에서 개최국의 역할, 무대 구성, 기념품으로 나누어 주어도 무방할 사전 준비물은 무엇으로 고를지 고민해야 한다’, ‘외국인 참가자들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패닉을 겪는 일이 무엇인지’,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음향 시설과 컨퍼런스룸의 수용 규모’, ‘전압이 다른 나라에서 온 참가자를 위해 여분으로 준비해야 할 아답터’까지도 모두 적었다. 그야말로 모두 모두 기록했다.

시행착오의 원인과 개선방안에 대해 빼곡히 적은 기획안을 신중하고 꼼꼼하게 완성했다. 그리고는 조직 위원회 총책임자의 연락처를 며칠간 수소문하였다. 드디어 그의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손에 넣었다. 그 후 며칠 뒤 이 문서는 조직 위원회 총책임자의 메일함으로 도착하게 된다. 조직위 구성 초기 단계에서 문서를 전달했기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준비 작업이 모두 끝난 뒤에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의견 전달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일종의 기준이 되어있다. 좋은 의견도 때가 있는 법. 아무리 훌륭한 의견이어도 전달 시기를 놓치면 소용이 없다. 뜬금없이 뒤늦게 나타난 획기적인 기획안은 여러 방식으로 나비 효과를 만든다. 사람 여럿이 모인 팀이 일정한 과정을 거쳐 공들여 만들어 놓은 결과를 흐트러뜨리고 그저 조화를 깨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때는 의견을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그들이 착안한 방식으로 함께 하며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메일을 보내면서 생각했다. 내가 보낸 기획안이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세팅을 마치고 때를 기다린다. (옆으로 유유히 지나가는 오리)


당장 며칠 부산에 있던 조직위원회 총책임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가지 질문을 받았다. 마침 스위스 제네바의 사무국에서 청소년 인턴 미셸이 기획단을 구성하고 있고 개최국 퍼실리테이터를 할 만한 한국 사람을 찾고 있다. 이 한 명만 찾으면 기획단 구성은 마감된다. 1번 질문, 당신을 추천해도 되겠느냐. 조직위에서도 제네바 사무국과 커뮤니케이션할 사람이 필요하다. 2번 질문, 우리 팀에서 가교 역할을 해 줄 수 있느냐. 내게 개최국 조직위와 기회단, 양쪽 모두와 일해줄 수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리고 3번 질문, 부산에 올 수 있느냐.)

대답은 Yes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대답한 긍정 답변이 나를 얼마나 곤란한 지점으로 몰아갈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제네바의 기획단은 기획단대로 기대와 계획이 있었고 부산의 조직위는 조직위대로 고된 준비 작업이 있었기에 현장에서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내 대답은 Yes였고 그 역할을 최대한 잘 수행하기 위해 양쪽의 불만 사항을 나름 유연하게 해석하고 기대와 불만의 밀도를 조절하여 전달했다. 제네바 사무국에서 진두진휘를 하고 있는 미셸을 주축으로 기획단과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주일간의 프로그램은 점차 흥미로운 테마로 채워져, 색칠을 액셀 파일로 매주 정기적으로 전달이 되었다. 나는 회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진도를 따라갔다. 나는 new comer 뉴커머였다. 각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로 기용한 기획단 구성원들이었다. 면면을 보면 모두들 명민하고 의욕이 있는 친구들이라 그들의 이메일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왔다. 나는 앞으로 3개월 후에 부산에서 개최될 컨퍼런스를 위해 회사에 일찌감치 양해를 구해 놓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홍대에서 친구들과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한 외국인이 저쪽 편 스탠딩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저, 카페 주인 분과 영어로 대화하는 걸 얼핏 들었는데 혹시 영어 과외 안 하실래요? 제가 영어를 단기 속성으로 배워서 이벤트 진행을 해야 합니다. 두 달 후에.”
미국에서 온 중학교 영어 선생님인 그는 흥미롭다 여겼는지 그 자리에서 흔쾌히 수락했고 나는 다음 주부터 그와 속성 과외를 시작한다. 그렇다, 나는 컨퍼런스에서 한국을 대표하여 무대에 서서 Cultural night 사회를 봐야 했던 것이다, 한복을 입고!

나는 중학교 영어 선생님 마크와 함께 스크립트를 차곡차곡 만들었다. 자, 서두는 이렇게 무대를 열고, 분위기를 띄울 때엔 힘차게 are you ready? 박수를 유도할 때는 give a big hand!라고 말하는 거다, 공연이 끝나면 such a passionate stage, wonderful 뜨거운 무대였죠, 굉장합니다! 등등
매우 기초적인 표현이었지만 긴장하고 있는 내게 이러한 표현이 입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결코 쉽지 않았다. 앞에 나서는 일, 모임에서든, 교회에서든, 파티에서든 관중 앞에서 사회를 보는 일은 내게 자주 주어졌던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걸 영어로 해야 한다고!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각 국가별 참가자들에게 특별히 이 세션은 모두 긴장감을 내려놓고 흥미롭게 즐기는 시간이었으니 진행자의 엉터리 영어라도 분위기를 크게 좌우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온종일 논의와 프리젠테이션으로 구성된 6일간의 프로그램을 따라가려면 잠시 쉴 틈이 필요했다.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사회자의 백 마디 말보다는 짜임새 있는 공연 구성이 더 와 닿는 법일 테니. 조직위에 부탁해 한국인 참가자들의 연락처를 전달받았다. 그들이 참가할 컨퍼런스에 대한 안내문과 함께, 우리가 무대를 함께 채울 ‘개최국 cultural night’을 위해 한복을 필수 지참해 달라는 요청을 적은 이메일을 일제히 발송했다. 나도 첫째 언니가 약혼식 때 최고급 주단으로 맞췄던 한복을 빌려와 드라이클리닝에 맡기고 구겨질세라 소중히 포장해 부산으로 챙겨갔다. 한국 cultural night의 날, 우리가 일제히 한복을 입고 사뿐사뿐 우아하게 등장하자 이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bravo! 고운 한복이 큰 몫을 차지했다.


나는 그날 전 세계에서 날아온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쳤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해석이 다소 무시무시했지만 ‘이건 그에게 저주를 퍼붓는 게 절대 아니고 그만큼 그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라고 시적인 표현이라 우겨가며 한 소절 한 소절을 짚어가며 음률을 가르쳤다. ‘아리랑’은 진정 아름다운 곡이었다. 가사 ‘아리랑 아라리오’가 반복하여 여러 차례 등장하니 곡을 이미 반 이상 ‘아리랑’만으로 채웠고 가사 설명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 내겐 한결 수월한 선곡이지 않은가! 탄력을 받아 세마치장단까지 가르쳤다. 다 같이 아리랑을 배경 음악으로 틀어놓고 세마치장단 합주를 했다. 박자를 제대로 못 맞추는 박치 참가자들 덕에 세마치장단은 별안간 자진모리가 되었다. 20대로 구성된 한국인 참가자들은 그 장면이 웃기고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앞에서 그 장면을 이끄는 나는 오죽했겠나. 하지만 재밌다고 따라오는 참가자들을 바라보며 더욱 흥을 돋웠다. 얼씨구나!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 만난 이들이 나를 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한마디가 있다, 바로 ‘아리랑’. 어떤 친구들은 나를 향해 ‘아리랑~ 아리랑~’ 하고 그때의 노래 한 소절을 부른다.


개최국 조직위에 있던 내가 2년 뒤 NGO 사무국에서 선발한 기획자가 되어 치른 덴마크 컨퍼런스에서는 또 다른 노래를 가르쳤다, ‘오소서 오소서 평화의 주님’. 기독교 NGO에서 활동하면 전 세계 가스펠을 거부감 없이 듣고 따라 부르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그 플레이 리스트에는 한국 성가도 포함이 되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우리 사무실에 네가 유일하다.” 참가자로서, 조직위 스태프로서, 기획단에 속한 퍼실리테이터로서 모든 자리를 고루 섭렵한 나의 경험과 전문성을 사무총장 롤란도는 높이 평가해 주었다. 종종 개최국의 조직위에서 뜬금없는 요청을 할 때에 사무국에서는 그 이면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요구의 의중을 알아들어야 할 경우가 있는데, 나의 경험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NGO에 지원서를 낼 때 강조하여 적은 부분을 사무총장 롤란도는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능력과 경험치가 충분히 발휘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매일이 벅차고 흥미로웠다. 내 일을 하며 작은 목표들을 성취하고 쌓아가는 과정이 이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일에 24시간 빠져서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실행할 궁리만 했다. 홍보에 힘을 기울이니 덴마크 개최국 조직위에서 스폰서를 찾는데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메모장을 머리맡에 두고 자다가 밤중에 일어나서 아이디어를 마구 적어놓고 다시 잠들었다. 꿈에서도 실사에서도 어떻게 더 나은 기획을 할까, 길 위에서도 사무실 안에서도 나는 공상에 빠져 있었다. 조직은 내게 자율성과 권한을 주었고 보호받으며 일한다는 확신에 마음의 안정이 왔다. 서로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이끌어 가는 힘은 상당히 파워풀했다.

조직의 비전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은 구성원으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예이다. 한 명의 근로자가 조직의 작은 소모품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의 기둥 하나를 책임지고 있다는 사명감이 생기면 최대치의 몰입감을 꺼낼 수 있다.

호스트 국가인 덴마크의 비싼 물가는 세계 몇 위 안에 꼽히기로 잘 알려진 곳이라 예산안을 잘 짜야했다. 6일간의 컨퍼런스, 전임 기획자들이 남겨 놓은 자료들을 열심히 검토했다. 커뮤니케이션 스타일, 일을 기획하는 과정, 팀을 조직하는 방식이 가히 그들다웠다. 2년 전 부산에서 처음 만난 기획단 헤드 미셸과 그의 후임 제임스는 각각 우루과이와 호주에서 온 나의 선임들이었다. 자신감 있고 거침없는 미셸은 1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우루과이로 돌아가 건축가가 되었고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꼼꼼한 제임스는 1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아예 상주 직원이 되었다. 부산에서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꿈에도 몰랐다. 이들이 나를 제네바로 이끌 .

두 눈이 충혈되어 다닐 정도로 고되게 일했던 나날들이, 쓰레기통으로 처박힐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내 몫을 하고 싶어서 작성한 기획안이,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미셸과 제임스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행동이 앞선다.’라는 지적을 하곤 했지만 행동하고 실천하면서 천천히 생각을 확장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닌가. 고민만 하다가는 자칫 도끼 자루가 모두 썩는다. 시행착오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임을 잊지 않는다. , 과오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너무 늦게까지 미루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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