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
2008년에 스위스와 오스트리아가 UEFA Euro 2008을 공동으로 개최했다. 스위스에서는 제네바, 바젤, 베른, 취리히의 경기장에서 유럽 주요 팀의 축구 매치를 호스트 했다. 평소에는 비교적 조용한 스위스의 거리가 이러한 이벤트를 계기로 조금은 활기찬 모습으로 변모했다.
프랑스팀의 축구 매치가 있던 날 나는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 UEFA European Football Championship을 구경하러 Fan Zone에 갔다. 광장에 거대한 스크린을 설치해 놓았고 광장의 테두리에는 각종 음식을 파는 텐트가 있었다. 나는 축구 경기 관람보다는 야시장에서 파는 태국 쌀국수를 먹겠다고 기숙사를 나선 참이었다. 미리암과 레미, 헤난과 마디가 함께 나왔다. “너는 뭐 먹을 거야? 난 팟타이.”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벌써 여기저기서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가 퍼졌다.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남자 사람 친구들과 축구 얘기를 했다. 나에게도 질문이 왔다. 그렇지! <무한도전>에 출연했던 축구 선수가 기억이 났다.
“아, 나도 프랑스 축구 선수 아는 사람 있어. 프랑스 국가 대표, 앙리!”
나는 두 명의 축구 선수, 앙리와 트레제게가 항상 헷갈렸다. 둘 다 악동 같은 이미지가 있고, 머리카락을 잔디인형처럼 모두 다 깎아버린 민머리라는 특징이 있다.
“응? 누구를 말하는 거야?”
“앙리, 앙리를 몰라? 그 사람을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왜 두상이 예쁘고 머리카락 없는 청년 말이야. 프랑스 국가 대표 선수잖아.”
이상한 일이었다. 왜 앙리를 몰라. 아무도 나의 말을 못 알아듣었고, 생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누구를 언급하는 건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수군수군 몇 마디가 오갔다. 헤난과 레미는 다소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심각하게 상의를 하는 듯했다. 축구 선수 누구를 말하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본인들이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고, 생전 모르는 이름이라고.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마디가 말했다.
“엉희!”
응? 엉희라니 이번에는 내가 의아했다.
그제야 레미와 헤난의 표정이 풀렸다.
“엉희를 말하는 거였구나.”
“울랄라라라…”
세상에, 내가 알고 있던 앙리, 내 이름처럼 ‘리’ 자 돌림이라고 농담을 하면서 좋아했는데, ‘엉희’였다니. 우리 언니들처럼 ‘희’ 자 돌림이었구나.. 나는 잠시 충격에 휩싸여 심호흡을 해야 했다.
사실상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프랑스 단어 발음을 전부 ‘바로 고침’ 해야 했다. 축구 선수 앙리뿐 아니라,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 Henri IV de France 또한 마찬가지였다.
NGO 근무를 시작하고 첫 두 주간은 동료들이 내가 제네바 생활에 적응을 잘하도록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이 자리에 오는 근무자는 기관에서 불어 학원을 등록해 주고 교육비를 지원해 준다. 회사는 내가 근무 시간에 외부에 나가서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캐롤은 그때 제네바 지리도 잘 모르는 나를 데리고 가서 Ecole Club Migro 초급반에 등록해 주었다. 이름도 예쁜 사설 어학원이었다, 에꼴 클럽. 아침마다 부지런히 불어 공부를 하러 다녔다. 하지만 2주 만에 나는 에꼴 클럽의 접수처에 찾아가 항의를 하고 만다. 지난 2주간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급기야 폭발하고 말았다.
"제가 등록한 반은 Debutant 즉 생짜 초급반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학생들이랑 선생님이랑 벌써부터 서로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하는 게 정상적인 커리큘럼입니까? 저들은 데뷔떵이 아니라고요!"
이미 불어로 의사 표현을 스스럼없이 할 줄 아는 학생들이 어떻게 데뷔떵이냐고. ‘어학원 선생님이 불어로 설명을 하는 걸 전부 알아듣는데 이들이 왜 초급반에 왔습니까?’
불어 첫 시간에 a아,b베,c쎄,d데 알파벳을 불어 발음으로 읽는 법을 배웠을 뿐인데, 바로 다음 시간부터 자유 대화를 하는 게 초급반 교과 과정이 맞냐 이거다. 이건 도저히 안 될 일이었다. 학생들은 프랑스어 문법을 전혀 모른 채, 어디서 주워들은 단어들을 조합해 스피킹을 하는 것만으로 대화가 어슴프레 구성이 되었다. 다시 신중하게 관찰을 하며 이들 면면을 살펴보았다. 제네바에서 8년을 근무한 미국인, 거주 3년 차쯤 된 포르투갈인 등이었다. 듣고 이해하고 말할 줄은 알아도 글자로 적을 줄은 모르니 데뷔떵이 맞았다. 에꼴 클럽의 교실에서 나의 설자리는 없었다. 회사에서 내게 교육비를 전액 지원해 주었으므로 최대한 결석하지 않고 성실히 다녔지만 매일, 매주, 어김없이 반복되던 그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콤플렉스가 생기기 시작했다.
항의를 하고 나온 접수처에서는 내게 '당신이 어서 열심히 공부해서 따라잡는 수밖에 없다. 저들을 반에서 내쫓을 수가 없다.'라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그래, 내가 학습 부진아구나.
급기야 나는 '좋아하다 Aimer' 동사를 배우는 날 교실 안에서 선언을 하고 말았다. 'Je n'aime pas le français, je n'aime pas les conjugaisons.' 난 불어 싫어, 동사 변형도 싫어!
그들은 웃었다.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그렇지만 이때보다 내가 진심이었던 적이 없다.
옆에서 수업 시간마다 자책을 일삼던 일본인 학생은 이번에도 수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서 자신의 머리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휴우.. 큰 소리로 한숨이 나왔다. 선생님은 이런 나를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어딘가에서 멈춰 세우지 않으면 불어 초급반의 운명은 산으로 넘어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미 노선을 정한 것 같았다. 결국에 초급반 마지막 수업에서는 프랑스 영화를 틀어주었다. 불어 알파벳을 배운 게 불과 2달 전인데 무슨 수로 영화 내용을 이해하겠나. 어쨌거나 이 수업이 내 스스로의 처지를 확인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했다. 약간의 열패감이 스며들어왔다.
한국의 설이나 추석처럼 유럽에도 모두들 본가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며칠 동안 공휴일로 삼아 쉬는 명절을 꼽는다면 그것은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이다. 제네바 근무를 시작한 후 별안간 생긴 부활절 휴가 동안 나는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당시 바티칸 미술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시스티나 성당에 있을 미켈란젤로의 벽화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을 실제로 볼 생각에 무척 기대가 되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한 단어는 엉뚱한 것이었다, 'Museo'.
바티칸 미술관을 찾아가는 길에도 미술관이 무척이나 많았다. 로마라는 도시는 온갖 다양한 미술관으로 잔뜩 채워져 모든 환경이 근사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걷는 골목마다 올라가는 언덕마다 Museo Chiaramonti, Museo Pio-Clementino, 등등 미술관이 무한정 등장하는 것만 같다. 내가 한참이나 바라본 그 단어 'Museo'. 지난 겨울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동안 파리 여행을 다녀왔는데 오르세 미술관의 불어 이름은 Musée d'Orsay였다.
박물관을 영어로 쓰면 Museum, 불어로 쓰면 Musée, 이탈리아어로 쓰면 Museo구나. 매우 흡사한 모양새이다. 당시 나는 생각했다. 이거 너무 억울한 경쟁인걸.
커뮤니케이션과 홍보 분야에 경력을 쌓아가고 있던 나로서 '영어 모국어'자가 아니라는 불리한 조건을 도대체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중이었다. 오히려 트라우마는 더 짙어졌다. '영어 모국어' 구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라틴어를 근간으로 발달한 언어들은 뿌리가 같아서 비슷한 모양새로 단어를 구성하여 통용되고 있고, 문화권이 다른 나 같은 사람은 백날을 해도 이들의 속도와 이해를 따라가지 못하겠구나. 언어를 장점으로 사용하는 직종은 내가 아무리 경력이 있어도 인정받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아마도 내 선택지에서 과감하게 버려야 하겠구나. 경쟁에서 안 될 싸움은 함부로 붙어서는 안 된다. 나는 두 손을 들었다.
미리암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너의 전문 분야는 어느 쪽인데?" "난 커뮤니케이션, 홍보 그리고 컨퍼런스 기획이야."
여러 경험을 근거로 나는 다시 선택해야 했다. 결국 국제기구 커뮤니케이션 분야는 선택 진로에서 일단 보류하자, 라는 씁쓸하고도 어려운 결론에 이르렀다.
무모해 보이는 일을 도모하기 위해 토끼굴로 기어 들어간 나란 사람이 감당할 일은 어쩐지 꽤 규모가 큰 어드벤처인지도 모르겠다. 단조롭게 사는 것을, 익숙한 안락함에 빠져드는 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어드벤처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나의 장점이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그 와중에는 신기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나의 콤플렉스에 대한 타인의 새로운 관점이었다. 어쩔 때는 내가 명백히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조건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달리 보일 때도 있다는 점이다.
이윽고 나는 언어에 대한 깊은 콤플렉스를 갖게 되어 표현에 더욱 공을 들이고, 기록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직장을 옮긴 뒤 한참 후의 에피소드이다. 우리 팀이 격주간으로 회의를 하며 서로 진행 사항을 토론하고 보고하던 당시의 일이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이들의 발언을 정확히 알아 들었는지 나는 100% 확신을 하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회의마다 나는 흡사 속기사 수준으로 모든 문구와 구절을 꼼꼼하게 필기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 후 2주 뒤, 다음 회의에서 나타났다. 언변이 좋은 수다쟁이 팀원들이 하도 말을 많이 하고, 엉키고 설켜서 누가 어떤 얘기를 했고 어떠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 그런 자리 있지 않나. 워낙 여러 사람이 중구난방 동시에 마구 떠들어서 결론이 뭐였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런데 나는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 내가 그들의 발언을 정리해주고 일의 분담과 지난번 회의의 결론을 상기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언어에 자신이 없으니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여 자칫하면 무언가 중요한 업무를 놓치게 될까 봐 꼼꼼히 경청하고 자세히 기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회의 중 필기를 열심히 하다가 보스의 발언이 확실치 않으면 고개를 들어 곧바로 질문을 했다. “그래서, 그 사안이 결정이 아직 ‘안’ 되었다는 거지요? 한번 더 검증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하고 내가 물으면 보스는 잠시 멈췄다. 팀원들이 이 사안에 대해 설명을 필요로 하는가 보다, 싶어서 못다 한 설명을 보충했다. 별안간 나는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일에 깊이 몰두하며 두루두루 진중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회의의 맥을 짚고 있는. 소 뒷걸음을 치다가 쥐를 밟은 격이지만. 자연스럽게 얻은 좋은 이미지를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고생하다가 한 번씩 얻어걸리는 것도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콤플렉스가 장점으로 작용해 준 결과이다.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의 콤플렉스가 당신을 도울 날이 올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