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당연히 당신을 도와줘야 한다? 기대는 배신한다
스스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미화하던지 비하하던지, 하여간 대체로 정확치 않다. 나는 국제기구를 목표로 삼고난 후, 곧이어 이력서를 고쳐 쓰기 시작했다. Cover letter라 칭하는 ‘자기소개서’, 이 많은 글자들을 조합해 스토리의 큰 축을 만들어내야 했다. 지금껏 쌓은 경력과 경험을 글에 매력적으로 녹여내야 한다. 하지만 잘 정리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만으로 누군가 나를 발탁해 주리라는 헛된 꿈은 애초 마음에 담지도 않았다.
각 기구의 홈페이지에 있는 리크루트 플랫폼에 마구잡이로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 어느 기구에서도 추후 연락은 없었다. 나중에 인사담당자에게 들은 얘기로는 최근 한 자리 공고를 낸 후 한 달 뒤 마감을 했는데 전세계 600명의 지원자가 접수를 했다고 한다. 1차 필터링을 하는 인사담당자들에게 어필할만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보완을 할 내용이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접근을 달리해야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러 다녔다. 딱 한번 인사를 한 사이지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고 저돌적으로 찾아가 현재의 내 상황을 브리핑하고 자문을 구했다. 나보다 먼저 제네바에 온 ‘선배들’에게는 국제기구 진입 노하우도, 정보도, 실패담도 있겠지. 병아리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물론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그날부터 매일 이력서 한 장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볼펜 한 자루와 함께. 혹시라도 시간 여유가 허락하여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내 이력서를 들여다 봐 준다면, 무언가 도움이 되는 작은 코멘트라도 해준다면.. 긴장된 마음으로 그의 앞에 내 이력서를 꺼내놓았다. 사실상 매우 절박한 심정이었다.
이력서에는 그동안 어느 기관의 어느 부서에서 어떠한 일들을 해왔는지, 경력을 요약해 일목요연 정리하게 되어 있다.
NGO와의 계약기간은 확정이 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6-7개월 안에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해외 체류 문제나 재정적인 조건은 내가 유연히 빠져나갈 수 있는 사안이 절대 아니다. 첨삭을 받은 이력서를 들고 돌아와 기숙사에서 그날그날 이력서를 수정했다. Version 1.부터 시작하여 십수개의 버전이 매일매일 새로이 만들어졌다.
제네바를 먼저 겪어본 ‘선배들’은 나보다 여러 방면에서 조건이 훌륭한 분들이었다. 외국인/내국인 구분 없이 언어를 여러개 구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해외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던가, Junior Professional Officer (JPO)로 시작해 발탁된 케이스, 정부 부처 출신으로 국제 기구에서 꽤 높은 자리에 근무하고 있다거나, 인턴십으로 시작해 고용에 성공하여 국제 기구 경력을 쌓고 있던지, 최소 박사이거나 해외 경험이 어마어마한 외교관의 자녀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여쭈어 보고 조언을 구했다. 차분히 들려주는 그분들의 이력은 참으로 근사하고 화려했다. 어떤 분들은 필기 시험 경험담을 말해 주기도 하고, 면접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 앞에 내 초라한 이력서와 볼펜 한 자루를 꺼내 놓는 것은 정말이지 창피한 일이었다. 그와중에 몇가지 깨우침이 있었다.
1. 타인에게 조언을 구할 때 괜히 스스로를 미화하거나 축소하지 말자.
“시험 삼아 한 번 해 보려고요. 안되면 말고.” 고민을 털어놓으며 이런 허세성 발언을 하는 이에게 성심으로 응원해 줄 사람이 있겠는가.
창피하더라도 정직해야 한다. 상대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본다. 두려운 마음으로 살며시 도움을 청하는 나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이들은 내 이력서를 흔쾌히 리뷰해 주었다. 앞에 놓인 이력서 한 부를 한 장씩 넘기며 그 안에 적혀있던 표현보다 더 나은 단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오타를 찾아내기도 했다. Cover letter 분량은 한 페이지를 넘기지 말라고 했다. 요약이 필수다. 부산스럽게 욕심내어 모두다 적을 필요 없다. 코어한 내용을 어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자기소개서를 영어로 길게 쓰는 게 부담이었는데 다행이군.’
정확한 견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볼 수 없던 지점을 꼬집어 주기도 했다.
2. 가혹한 코멘트를 듣고 상대를 원망하지 말자.
사람의 말은 유통기한이 없다는 한 소설가의 말을 기억한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능성이 낮다,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거 아니냐, 왜 제네바에 집착하냐, 그냥 한국에 가라, 학벌이 약하니 해외 학위로 보강해라, 시집이나 가라. 듣기 싫은 소리를 듣고 마음이 상하거나 ‘내가 지금 뭘 하고 온 거지?’ 하염없이 공허해져서 터덜터덜 돌아올 때도 물론 있었다.
상처가 고여들 틈이 없이 바로 털어버렸다. 그들이 내게 시간을 할애해 줄 이유도 명분도 없었는데 나를 만나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기여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옳았다. 이들은 친분이 깊지 않은 누군가가 조언을 구할 때 시간을 기꺼이 내주었다. 어린 친구에게 밥값을 내라고 할 수 없으니 본인이 식사비를 지불하기까지 한 이들의 공헌을 감사하게 받아들이자. 살아온 풍경이 다르니 시선도 천차만별이다. 세상의 모두가 희망전도사일 수는 없다.
3. 필터링은 내 몫이다. 취사선택을 정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미 있는 진전이 있으면 공유하자.
주요한 도움은 잘 소화하고 부당한 발언들은 얼른 털어버려야 했다. 독설이든 찬사든, 내가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었으니 걸러서 삼켜야 하는 것은 듣는자의 몫이다. 때로는 독설도 도움이 된다. 실무에 있는 인사권자들이 내 지원서를 받아보고 느낄 법한 인상을 말해주었으니. 결과적으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코멘트를 했다고 그들을 원망할 명분이 없다. 나는 촛불처럼 흔들릴 여유조차 없었다. 시간이 모자란 사람에게는 정서적 호흡이 짧을 수밖에 없다. 자기 연민이란 대단한 사치이다.
대신 한 가지, 주효한 정보를 제공했거나 도움이 될만한 지인을 직접 소개해 준 선배들에게는 꼭 추후에 보고를 했다. 귀중한 조언을 주어서 내가 이만큼 발전시켰다고. 당신 덕분에 무언가 도약하고 있다. 댓가 없는 상담을 해주신 분들한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치고 참으로 빈약했지만 보람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국제기구 지원서에는 3인의 reference를 의무적으로 적시하도록 되어 있다. 그 후보를 고용할 경우 신원 조회를 확인할 인물들이다. 귀중한 소스를 알려준 것이 이미 충분히 큰 도움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필요를 채워주었다. 본인께서 흔쾌히 신원보증인이 되어 주겠다고 연락처/주소, 직장 정보를 모두 알려주었다. 그들로 인해 나의 지평이 넓어진 것은 물론이다. 이들이 나를 같은 구역의 동료로 인정해 주었다는 뿌듯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4.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부탁은 공손하게 하자. 프라이버시 침해는 금물이다.
“주말에 심심하면 내 자기소개서 좀 봐줘요. (안 심심할 예정인데요.) 패인을 분석해 달라는데 그 정도도 못 합니까. 다시 써달라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런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이메일 제목은 ‘요청’이었다. 업무 요청도 아니고 개인적인 부탁을 하면서 다소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빈정이 상했다.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조언을 구한다면서 은근히 평가를 내리려는 시도도 있다. 주로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발생한다. 60대에 진입한 두 분의 선배님들과 얼마 전 동석을 했다. 한 분(B)은 최근에 정년 퇴임을 하셨고, 한 분(A)은 퇴직을 앞두고 이 분께 자문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상황이었다. A선배는 연금 때문에 퇴직 시기를 늦춰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국제 기구에서 퇴직을 하면 연금 수령 옵션이 있다. USD 미국 달러/CHF스위스 프랑/KRW 한국 원화 선택권이 있는데, 환율 상황마다 수령액수에 유리하기도 불리하기도 하다. 옆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나는 기함을 했다. 물어보는 질문과 대답마다 두 분의 충돌이 과연 아슬아슬 했다.
A (퇴임 직전 선배): 연금 계산을 잘 해야 하는데 세금부터, 보험, 생활비 규모를 가늠할 수가 없어요. 선배님은 어떻게 운용을 합니까?
B (퇴임 직후 선배): Xx%가 세금이야. 퇴직하면 세금 나가는 것도 속이 상해. 그게 일하는 동안 근로소득에서 세금 나가는 거랑 차원이 달라. 집에 가만이 있는데 돈을 왕창 뜯기는 것 같다니까.
A: 뭐 있는대로 사는 거지 왜 그렇게 돈돈 해요?
나: (응? 자문을 구하는 자리 맞아?)
A: 그래서 선배님은 매일 뭐하면서 지내요? 생활비를 한달에 얼마나 써요?
B: (개인 사생활 꼬치꼬치 물으니 불쾌함 표시 중)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지. 의외로 여기저기 많이 들어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본인 씀씀이를 잘 계산해봐.
A: 뭐 노인네가 돈 쓸 게 그리 많나? 그래서 한달 생활비 지출이 얼마나 되는데요?
B: (버럭!)
A선배는 우리 사이에 그 정도도 못 물어보냐며 B선배를 원망했고, 사람이 퇴직하더니 더 괴팍해졌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답변을 듣는 족족 본인이 상대방을 평가하려 들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경청은커녕 상대방을 품평하려 드는데 발화자가 기분이 상한 건 당연하다. 조언을 구한답시고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파고들며 ‘대답을 안해주면 서운하다’는 식으로 꼬치꼬치 캐묻는 것을 삼가야 한다.
조언자들이 자신에게 그간의 부침을 다 꺼내보여주며 실속있는 상담을 해주고, 제안한 방법이 통했는지 아닌지 애프터 서비스까지 해줘야 한다고는 애초에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섭섭해 하지 않는 게 좋다. 내가 그에게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 한 것이다. 상대를 충분히 감화하고 설득하지 못한 건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남들이 당연히 당신을 도와줘야 한다고 착각하지 말자. 착수 시점에 본인 기준을 이같이 정해버리면 실망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도 있다. 사람들은 의외로 감정의 동물이라 감화하면 움직인다. 많은 것은 태도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