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주춤하던 나를 직진하게 만든 두 인물 (2)

자신의 네트워크를 열어준 은인

by Aeree Baik 애리백

출입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겨우 코앞에 당도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가까워졌다고 말이다. 빈손으로 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랬다. 스타팅 라인에 서 보는 것조차 어려워 보여 상심하고, 시작 지점을 넘어보지도 못할까 봐 속을 끓이던 그런 수많은 날들이 있었다.

경력도, 이력도, 목표도 달랐던 내가 국제기구를 목적지로 설정해놓고 보니 상황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나는 헤매는 중이다.’ 무언가 해보겠다고 주변부에 발을 담갔으나 수심을 결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은 내가 그다지 겁도 없고 부끄러움도 크지 않다는 점이다. 허우적대다 보면 뭐라도 잡히겠지. 다소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의 성취가 목전에 있다는 막연한 예감이었다.

구직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창피한 게 없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고충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점점 구체적이고 명확해졌다. 여러 번 구술하다 보니 나의 처지가 나 자신에게 명료하게 와 닿았다. 뜬구름을 잡던 포지션에서 슬슬 현실 감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따금씩은 너무 막막했다. 도달하려는 목적지가 마치 전혀 별개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주변인들에게 근사하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욕심을 처절한 마음으로 패대기쳤다. 나의 장점을 구체적으로 어필하는 동시에 단점 또한 적나라하게 밝혔다. 다양한 사람들이 해주는 조언을 흘려듣지 않고 꼼꼼하게 메모를 해두었다.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UNHCR) 세계난민기구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우리 NGO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아사바 주니치로에게 ‘자기소개서’를 한번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며 물었다. 무엇을 보완해야겠느냐고. 그는 내게 즉답을 했다. 영어 작문을 좀 더 매끄럽게 하도록 롸이팅 연습을 해야겠다.

NGO의 동료 캐롤과 제임스의 도움을 받아 영어 작문을 첨삭지도 받았지만 아직 장문의 보고서를 쓸 실력이 되지는 않았다. 3박 4일의 이사회 회의 기록을 적어 책으로 만들어 배포하는 것은 영어 모국어자 제임스의 몫이었다. 다양한 용도와 목적에 맞춰 어휘와 표현을 달리하는 글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무리 모국어 문장이 수려한 사람도 언어가 바뀐다면 그 수사와 문장력이 혼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공식 문서에서 쓰는 어휘와 문법은 평소 내가 적어간 글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성격이다. 아사바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Writing, 특히 보고서용 글쓰기는 어렵다. 그 조직만의 표현이 따로 존재하기도 한다.


내가 국제기구에 관심을 두고 여기저기 지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변인들이 조금씩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실무를 다루는 사람들은 조언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한 인물을 거론하며 A가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코치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B는 인사과에 있기 때문에 요즘 부서들에서 필요로 하는 인턴들이나 더 나아가 패인을 분석해줄 수 있을 것이다. 국제기구 이곳저곳에 마구잡이로 지원서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스스로 엄두를 내기엔 장벽이 높아서 들어가지 못 한 어떠한 세계를 한숨을 깊이 쉬어가며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심경이었다. 항해선에서 망원경을 통해 바라만 본 하나의 먼 대륙에 대한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직접 닻을 내리고 정박해 땅에 발을 딛고 물을 찾아나가고 숲을 발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평면으로 된 세계지도를 벽에 붙여놓고 아무리 아침저녁으로 바라만 본들 그게 세계 여행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생각했다. ‘저곳을 나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가. 그것이 내게 허락된 최대치일까.’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세계에서 명백한 이방인인 나는 발을 뗄 수 없던 한 대륙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었다. 망망대해에 존재하는 한 명의 표류자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때 나를 그 대륙에 발을 딛게끔 해 준 1인이 존재한다. 당신도 이 대륙의 일원이라 인정해준 선배였다. 구획을 구분하고 인간 부류를 나누고 같은 카테고리 안의 사람들과만 손을 잡는 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어느 날, 지인은 내게 한 인물의 존재를 알려준다. ‘애리 씨와 비슷한 또래의 JPO 합격자가 곧 근무를 시작한다고 한다. 현재 프랑스에서 불어 공부를 하는 중인데 제네바 근무지에 미리 와서 인사를 하고 갔다. 정식 출근을 하면 소개해 줄 테니 서로 알고 지내면 좋지 않겠는가. 인사라도 하고 지내라.’ 그리하여 제네바에 당도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어릴 적 외국에서 다년간 생활하여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능통했고, 불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대기업을 들어갔고 자신의 길을 다시 찾아 뉴욕 유엔 본부 인턴십에 도전했는데 공채 합격이 된 인물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10인 안팎을 선발하는 Junior Professional Officer (JPO) 시험에 합격하여 국비 지원으로 방금 발령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른바 알파 보이, 엄친아였다. 나와는 차이가 컸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NGO에서 11개월짜리 계약으로 단기 근무를 하는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뒤늦게 국제기구에 도전하겠다고 결심한 내가 딱해 보였는지 그는 본인이 갖고 있던 따끈따끈한 취업 자료들을 내게 보내주기도 하고, 이력서를 첨삭해 주기도 했다.

제네바의 올드 타운, 골목을 지나 드라마틱한 광장이 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신입 JPO로서 본인에게 주어진 과외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유엔 국제기구에 근무 중인 ‘국제공무원’ 한국인 네트워크가 있다고 했다. 주소록과 모임 공지와 관리를 본인이 새로이 맡았다고 했다. NGO 근무자인 나를 그 주소록에 포함시키겠다고. 괜찮겠느냐고.

그뿐이 아니었다. 국제기구에 3개월 혹은 6개월 단기로 와있는 무급 인턴들과 유럽 물리 입자 연구소 The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 (CERN)에서 근무 중인 물리학 박사과정생들의 연락처도 포함시키겠다며 내가 아는 이들의 연락처를 물어왔다.


이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정직원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국제공무원도 아닌 뜨내기들을 모두 껴안겠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국제기구 직원도 아닌데 괜찮겠어요?’하고 묻는 내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모두들 제네바에서 근무하는 한국인들인데 굳이 소속을 구별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혀 별개의 세계라 느꼈던 영역에 이방인인 나를 포함시켜준 일대의 사건이었다. 묘목을 땅에 심듯이 그대로 옮겨 심어놔 준 것이다. 내게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어서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고군분투하는 ‘무명인’들을 그저 자연스럽게 포용했다. 사람 자체의 선한 영향력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Jungle gym 정글짐과 같은 네트워크를 선망한다.


모임에서는 날씨가 좋을 때 레만 호숫가에서 바베큐를 하기도 했고, 이따금씩 식사 모임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품어 주었기에 나는 별안간 네트워크가 생겼다. 망망대해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저 땅이 어쩐지 현실감 있게 느껴진 시점이다. 만질 수 있는 실체가 느껴진 것이다.

자신의 네트워크를 열어준 은인의 등장은 내게 자신감을 만들어 주었다. 선망하는 모델이 생겼고 찾아가서 질문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다. 누군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할 때는 그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대화를 유도하고 내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더 많이 들을 수 있도록 옆에서 애써주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다양하고도 출중한 사람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경청해가며 차곡차곡 교훈을 쌓아갔다. 그리고 국제기구 지원서에 보완할 부분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조금씩 느꼈다. 사람들은 못난이들을 응원하고 연민하고 또는 그들에게 이입하기도 한다는 걸. 그들의 잔잔한 응원이 내게 스며들었다.

이때 착한 영향력을 충분히 수혜한 사람이기에 나는 후배들이 다가올 때 일단 시간을 내어줘야 한다는 원칙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고스란히 열어 주었고, 나는 그 선한 마음의 세례를 받았다. 감사하고 감동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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