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는 것
국제기구에 지원서를 열심히 내보았지만 추후 연락이 온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불합격했다는 연락조차 없었다.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두컴컴한 바위 동굴 안에서 벽을 짚어가며 발로 땅을 겨우 더듬어가며 전진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예 두 눈을 감고 걷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노력한다고 될 일일까? 깜깜한 동굴에 왜 들어가야 하는 거지? 발 앞은 절벽이 아닐까? 불안해지니 점점 내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선택을 해야 했다. 한국에서 이미 5년의 경력이 있었지만 그건 잊자. 나는 국제기구를 진입하기 위해 기어를 바꾸어야 한다. 인턴십으로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인턴십은 사회 초년생이나 대학원 재학생들이 지원하는 제도였다. 유엔 산하 국제기구들의 인턴십은 무급 제도이다. 보수가 전혀 없다. 생활비와 숙소를 본인이 해결해야 하며 기관은 어떠한 형태의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투잡이 전면 불가능하다.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인이 스스로 자금 조달을 하며 무급 인턴십을 하겠다는 건 상당히 무모한 일이다. 최소한 내겐 그랬다. 하지만 국제기구에 갈 수 있는 방법으로 내게 아주 조금이라도 현실성이 있는 방법은 인턴십이 유일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일단 안착한 뒤에 다음 단계로 가자는 계산이었다. 이조차 실현이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모험이었다.
통장 잔고를 매일같이 확인했다. 덴마크에서 컨퍼런스 주최를 마치면 곧바로 한 달 이내에 NGO와의 계약이 끝난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수입도 없고, 숙소도 없고, 직장도 없어진다. 속수무책인 그 상황에서 이후에 내가 제네바에서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기간을 계산해보았다. 잔고의 액수를 소분해 보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활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이미 나는 서울에서 다년간 최저생계비에 이르지 못하는 비용으로 한 달을 꾸리며 살아왔다. 첫 직장을 다닐 때도, 이직을 한 뒤에도 박봉으로 버텼다. 어차피 훈련된 ‘가난한 삶’이 여기서 노하우를 발휘할지도 모른다. 안 해본 것을 생경하게 마주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희한한 자신감이 있었다.
모든 국제기구가 인턴들을 무급으로 고용하는 것은 아니다. 드물게 몇 개의 기관에서는 최소한의 보수를 지급했다.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이주기구(IOM) 또는 세계무역기구(WTO)는 인턴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 제네바에서 허리 졸라가며 겨우 빠듯하게 살 수 있을 만큼의 보수이다. 이 기관들은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고 엄청난 프로필을 보유한 지원자들이 인턴십에 대거 몰린다.
일단 무급으로라도 인턴을 하겠다고 결정한 뒤의 일도 깜깜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국제기구에 인턴 지원서를 제출했다. 파리의 유네스코에도 지원했다. 모든 회사는 커뮤니케이션팀이 있고, 컨퍼런스 혹은 이벤트 기획팀이 있다. 그 팀들에서 눈 밝은 누군가가 나의 프로필을 발견해주리라 간절히 기대하며 온라인 지원서를 받아 작성하고, 송부했고, 기다렸다. 전혀, 그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무도. 단 한 곳도 피드백을 주지 않았다. 몇 달이 그렇게 초조하게 지나갔다.
앞이 막막할 때, 속상하고 답답할 때 늘 반복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걷는 것이다. 끝없이 걷는다.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갈 수 없을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란할 때 늘 걸었다. 걸으며 생각의 방향을 바꿔본다. 헤드폰을 끼고 홍대에서 시작해 걸어서 양화대교를 건너고 선유도 공원에 가고 목동에 갔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보인다. 상수동에서 시작해 광흥창과 서강대를 지나 서강대교를 걸었다. 서서 오뎅 국물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을 지나 음악을 들으며 걷고 또 걸었다. 음악 속 가사를 따라 하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길에 털어놓는다. 조금은 개운해진다.
감정이 소용돌이칠 때는 주변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를 절대적으로 줄인다. 내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온갖 부정적인 언사를 그들에게 쏟아놓고 싶지 않다. 우울감을 전시하고 싶지도 않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하소연을 사람들 앞에서 뿜어내고 싶지 않다. 내가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방식이다.
나는 이미 노선을 정했으니 타인의 위로나 염려가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염려를 가장한 질시와 질타를 소화하기도 쉽지 않은 순간이 온다.
레만 호수 주변을 걷고 또 걸었다. 스위스의 산과 호수는 늘 아름답다. 비가 와서 아름답고, 또 날이
개어서 아름답다. 친구가 음악을 잔뜩 넣어놓은 자신의 mp3를 내게 주었다. 한 번은 세상에서 제일 싸고 단순한 mp3를 구매하기 위해 검색을 하던 중이었는데, 그걸 그 친구가 포착한 것이다. 친구의 음악 취향은 다양했다. ‘You raise me up’ mp3를 크게 켜고 헤드폰을 낀 채 레만 호수를, 제네바 거리를, 몽블랑 다리를 걷고 또 걸었다. 어느 날 신발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
땅에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아주 사소한 결정이라도 내 목소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그 자기 존중감을 나 자신은 기억한다.
지금까지는 반대의 경우로, 타인에게 매어 살았을 테니까. 다른 사람이, 부모가, 주변이 나를 대신하여 결정한 매 순간이, 늘 끌려다닌 일생이 결국은 내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서러움 속에 처박는다. 나의 인생을 평가하려는 주변인들의 부정적인 소리를 흘려듣고, 나 자신의 목소리로 그걸 덮어야 한다. 내 목소리가 에코를 만들어 공명하도록.
이루지 못할 목표를 세우고, 언감생심 꿈꿨다고 해도, 내가 결정한 노선은 바뀌지 않았다. 실패하게 된다면 내게 남는 교훈은 있다. 나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버틸 수 있는 지점은 어디까지인지 알게 된다. 나의 조건으로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실체’를 경험하게 된다. 몸으로 습득한다. 그리고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끝까지 가봤기에 후회 없이 깨끗하게 단념할 수도 있게 된다. ‘나의 선택’이었기에 실패도 레슨이 된다.
하지만 남이 결정한 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실패한 경우 본인이 지금껏 고생해 증명한 것이라곤 ‘애초 남의 선택이 틀렸었다.’가 되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 컨퍼런스를 무사히 잘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저가항공으로 영국 런던에 들러 며칠을 머물렀다. 트라팔가 광장 앞에 있는 브리티시 뮤지엄 British Museum에는 오노 요코 Ono Yoko 특별전이 있었다. Wish Tree Yoko Ono art series 였다. 미술 감상자들이 Wish Tree에 자신이 원하는 희망을 적어 걸어 풍성한 나무를 만들어가는 참여 미술 작품이었다. 그때 작품을 설명하는 벽면에 적혀 있던 문구를 기억한다. “Keep wishing.” 나는 트리에 한 장의 메모를 신중히 적어 걸어놓았다.
‘유럽에서 일하고 싶어요.’
유럽에서 ‘사는 것’이 내 목표는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메모는 스스로에게 거는 강한 암시이기도 했다. Wish Tree는 이번 전시를 마치고 핀란드에 간다고 했다. ‘소원이여, 버텨주거라!’
에너지를 쏟아부어 꽉 찬 컨퍼런스를 마치고 덴마크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자 사무총장 롤란도는 나를 불렀다. 간단한 평가 회의와 함께 그동안의 수고를 치하해 주었다.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이후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고.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한국행 귀국 비행기표는 현찰로 지급받은 상황이었다. NGO와의 계약은 3주 뒤에 만료가 된다.
그때 롤란도는 내게 추가로 한 달을 더 근무할 수 있는지 물었다. 동료들은 각자 여름휴가로 자리를 비울 예정이고 본인도 출장이 계획에 잡혀있는데 내가 사무실에서 백업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원래 계획대로라면 3주 뒤에 나는 NGO가 제공하는 기숙사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신분증이 곧 만료가 되고 외국인 신분으로서 스위스 체류 근간이 사라진다. 초조함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책상 밑으로 조용히 두 주먹을 마주 잡았다. 숨이 쉬어졌다. 축구 경기로 치자면 후반전이 끝난 뒤에 몇 분간의 엑스트라 타임이 주어진 상황이었다. 내게는 단비 같은 단 몇 주간의 추가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다행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3주 뒤, 나는 길을 걷다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세계기상기구(WMO)였다. 전화를 끊고 난 뒤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길에서 꼬박 30분 동안을.
그러니까 쉼 없이 걷던 길에서, 많은 일이 벌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