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나의 comfort zone을 찾아서

취향은 자라난다

by Aeree Baik 애리백

기숙사 맞은편을 가로지르는 길에는 제네바 그랑 떼아뜨르 오페라 극장의 연습실이 있었다. 미장센을 맞추어 보는 그 연습실에서 가끔씩 이들의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문을 열고 음악이 들려오고 있는 출처를 몇번이나 찾곤 했었다. 이들이 오는 날들은 나로서는 꽤 운이 좋은 날이었다. 문을 열고 기숙사 방에 딸려 있는 아주 작은 테라스에 나가 이따금씩 난간에 배를 대고 상체를 최대한 멀리 밖으로 내밀고는 기대어 서서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아아, 오페라다. 아름다운 선율은 아주 멀기만 하고 아스라한 소리로 들렸지만 무척이나 근사했다.

하루는 음악이 들려오는 비좁은 테라스에 의자를 꺼내놓았다. 테라스의 폭이 의자 너비와 꼭 들어맞았다. 다리를 접어 무릎을 오므리고 의자에 올린채, 그렇게 의자에 쪼그리고 앉은채 양쪽 무릎에 책을 펼쳐놓고 마음껏 읽었다. 작은 기숙사 내 방 책장에 소장하고 있던 도대체 몇권 안되는 책 중엔 단 두 권만이 한국 소설이었다. 오페라 연주를 들으며 한국어 철자가, 활자들이 마치 음표처럼 리듬을 찾아갔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바스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넘겼다. 귀한 소설을 꼭꼭 씹어 읽었다. 종이의 촉감이 좋았다. '그래, 한국에서 만드는 책들은 참 정성스럽게 마감이 되어 있어. 종이도 좋은 걸 쓰지.'


배경으로 들리던 오페라 음악이 가끔씩 멈추고, 곧이어 아예 사라져 버릴 때에도 기쁜 마음으로 소설을 마저 읽었다. 국제기구 인턴십을 하며 역량이 부족해 치이고, 출중한 사람 속에서 부대끼고 다치고 고단했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가벼워졌다. 신기하게도 한순간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기묘했다. 음악이 보여주는 세계가, 그리고 소설이 나를 그 안으로 이끌어 위안을 주었다. 내밀한 평안을 선사하는 그 순간이 끓어오르거나 차가워 얼어붙은 나의 온도를 적정선으로 올려 놓았다. 매우 짧은 동안에 말이다.

그해 가을, 제네바에 오기 전 뜨거운 여름을 뉴욕에서 보냈다. 뉴욕은 참으로 덥고 지저분하고 매력적이며 말 할 수 없이 흥분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몇 블록을 걸으면 <더 뉴욕 타임즈>가 나오고 그 아래엔 패션 디스트릭트가 있었다. 늘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겨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놓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주 적은 예산으로도 많은 문화적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할렘의 허름한 바에서 병맥주 한 병 값에 어마어마한 재즈 연주를 듣곤했다. 재즈의 명문 뉴욕의 <블루 노트>에서는 골목을 헤매며 겨우 찾아가 문이 닫힌 외관 앞에서 기념 사진 한 장만을 찍고 돌아 왔다. '언젠가는 내가 칙 코리아와 허비 행콕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돌아오는 길에 핑크색 달달한 컵케이크를 사 먹으며 생각했다. HBO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 브래드쇼가 벤치에 앉아 베어 물어 먹던 그 컵케이크였다. 그저 많은 것들을 소망하던 시절이었다.


핑크색 컵케이크를 먹고 있는 극중 미란다와 캐리 <섹스 앤 더 시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머니 사정은 늘 빠듯했고 가방엔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챙겨온 샌드위치가 들어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장소는 당연코 뉴욕의 콜럼부스 서클(Columbus Circle)과 그 앞의 링컨 센터(Lincoln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였다. 센트럴 파크를 앞에 두고 링컨 센터의 분수 계단에 앉아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앞에 있는 웅장한 건물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당 Every Fisher Hall이고 마주보는 우아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건물은 뉴욕의 오페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였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도,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도 보고 싶었다. 너무나!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이건 언감생심이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한 장면처럼 화려한 극장을 마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씹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어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서점에 들러 9.90$짜리 오케스트라 실황 음반을 샀다. 뒷표지 내용을 읽고 또 한참을 확인하며 신중히 고른 음반이다. 무려 시디가 네 장이나 들어있는 EMI 음반에서는 지휘자 본 카라얀과 주빈 메타와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와 키리테 카나와가 뉴욕 필하모닉과 연주를 했다.

그리고 곧 알게된 사실에 나는 잠을 설쳤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 현장 티켓 부스에 가서 표를 사는 거다! 아아, 한번이라도 봤으면 하고 그토록 바라던 뉴욕 필하모닉이라니, 이건 과연 현실이 아닐세. 일단 자고 보자. 얼른 자자고, 아침에 9시까지 링컨 센터에 도착해야 하니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잠을 청했다. 그렇다, 뉴욕필엔 오픈 리허설이 있었던 것이다! 관객들이 오케스트라의 연습 시간을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티켓은 단돈 15$였다. 오전 9시 45분에 시작하는 뉴욕필의 리허설은 동일한 음악당,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연습을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사복을 입고 있었을뿐, 모두 세계 정상급 음악가들이라 연습은 실황이랑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EMI 클래식 시디 시리즈에서 듣던 그 소리였다. 역시 편한 면바지에 잠바를 입고 나타난 지휘자 로린 마젤은 지휘자석에 앉아 지휘를 했다. 앳된 바이올리니스트 Janine Jansen의 연주는 파워풀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필이 있는 링컨 센터



별안간 우리집의 일요일 풍경이 생각났다. 모두들 늦잠을 자고 있던 아침, 아빠는 2층집이었던 우리집 창문을 차례로 하나씩 하나씩 모조리 열어 제친 후, 그 다음 침대 안에 꽁꽁 숨어 있는 우리들의 이불을 차례로 하나씩 하나씩 열어 제쳤다. 바람이 엄청 차가웠다. 여전히 새우처럼 웅크려 누워있던 나는 발 끝에 겨우 걸려 있는 이불을 안간힘을 써가며 끌어 올렸지만 이불을 한번 더 걷어차는 아빠보다 한 발 늦었다. 교회에 가기 위해 모두들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다. 아빠는 음악을 최대한 크게 틀었다. 어느날은 베토벤이었고, 어느날은 바그너였다. 호화로운 오케스트라였다. 아빠가 꺼내놓은 커다란 박스 안에는 세계명곡 클래식 시리즈 카세트 테이프가 가득했다. 어느날은 왈츠였고, 어느날은 관악기가 소리를 뿜어내며 우리 2층집 지붕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매주 뉴욕에서 뉴욕 필하모닉의 오픈 리허설을 들으며 그날의 일요일 아침을 생각했다. 곧 그 음악이 베토벤 심포니 넘버 9. Beethoven Symphonies Nos. 9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요일 아침, 아빠가 열어놓은 창문의 차가운 바람이 나의 회상 속에서 커다란 음악 소리와 함께 스쳐지나갔다. 링컨 센터에서 아빠를 떠올리다니.

오픈 리허설은 12시쯤 끝났다.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저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언가 음악을 들으며 골똘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그 뉴요커들처럼 철퍼덕 바닥에 앉아 한인교회에서 빌려온 소설을 읽었다. 귀에는 EMI 클래식 음반을 플레이하고. 소설책은 소설가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이었다. 그리고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보러가려고 티켓을 끊어놓고 하루종일 설렜다. 시즌이 시작되었고 국제학생증의 덕택에 왕창 할인을 받아 구입한 학생 티켓은 20$이었다. 오페라에는 과문했지만 처음 들어가본 오페라 하우스는 근사했다. 아름다운 의상과 새로운 막이 시작될 때마다 바뀌는 신기한 무대와 합창단이 경이로웠다. 오랫동안 호흡을 참아가며 강렬하게 발성을 하는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정성을 다해 무대에 서는 성악가들이 감동스러웠다. 조금씩 스토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차 오페라의 서사가 내게 설득력을 갖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일요일마다 출석했던 교회에는 아주 작은 성가대가 있었다. 많이 모이면 5인이 전부였다. 그 인원으로 소프라노, 알토, 테너, 이렇게 3성부가 겨우 형성이 되었다. 지휘자는 뉴욕 메네스 음악 학교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젊은 음악도는 소프라노 파트를 연주하며 지휘를 함께 했는데, 당시 내게는 음악적인 훈련을 맛볼 수 있는 기회이자 일종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막연한 멜로디 구현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스토리를 주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달까. 젊은 음악도는 연습을 시작하기 전 우리 5인에게 악보를 나누어주고난 뒤에 영어 딕션이 좋은 한 명을 지목해서 가사를 소리내어 읽게 했다. 그렇다. 일단 가사 전달이 중요했다. 가사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음을 쌓아갔다. 스토리와 가사를 해석하는 연습이 되었다. 의미를 이해하고 몸으로 받아들여야했다. 슬픈 곡은 슬픈 감성으로 환희에 가득찬 곡은 기쁨으로, 목소리를 통해 담아냈다. 음악이라는 것이 뭔지 이제야 할 것 같았다. 그같은 접근으로 조명하니 난해하게 느껴졌던 오페라의 스토리가 살며시 보이기 시작했다.

작곡가가 악보 맨 윗편에 적어 놓은 단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풍성하게', '기쁨을 담아', '비탄에 잠겨'. 작곡가는 그의 음악을 연주해 줄 가수들에게 구체적으로 부탁을 하고 있었다. 작곡자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고 해석해 달라고. 어릴 적 내가 속해 있던 시온성가대가 생각이 났다. 지휘자 선생님은 가장 슬픈 곡을 연주할 솔리스트로 줄곧 나를 지목하셨다. 매년 그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파 애통해 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곡이었다. '얼마나 아프실까.. 못 박힌 두 손과 발..' 첫줄이 이렇게 시작되는 가사였다. 힘이 없고 구슬픈 내 목소리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예수의 죽음에 초목까지도 울며 슬퍼하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가 작아서 마이크를 설치해야 했다. 지휘자 선생님은 10살 남짓의 아이들에게 구체적인 가사 해석을 주문할 수 없어서 내 목소리에서 스며나오는 '구슬픔'을 캐스팅 한 거였다. 어릴 적부터 난 단조곡이 좋았다. 대신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기쁘고 힘차고, 뜨거운 환희에 가득찬 곡은 내게 순서가 오지 않았다.

작곡가가 요청했다. Freely, with expression이라고. 이제 연주자의 몫이다. .


NGO에 근무하기 위해 제네바에 도착한 첫 주, 때는 바야흐로 제네바 국제 콩쿨 기간이었다. 1971년 젊은 첼리스트 정명화가 수상했던 세계적인 콩쿨이다. 그해의 경연 종목은 성악이었다. 모두들 본국에서 라이징 스타로 불릴만한 젊은 음악가들이 대거 경연을 위해 제네바에 왔다. 한 달 전 긴장된 마음으로 여러벌의 드레스와 턱시도를 챙겨 제네바에 도착했을 것이다. 예선을 거치고 곧 쿼터 파이널이 끝나고, 그리고는 모두들 우수수 떨어져 나가 단 몇명밖에 최종 본선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내가 제네바에 도착한 그 주말에 세미 파이널 주자들이 결정되었다. 세미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한국인 성악가가 있었다. 그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어 그 계기로 제네바 국제 콩쿨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그해 우승을 했다.)

콩쿨이 펼쳐지고 있는 제네바 음악학교를 찾아갔었다. 도착해보니 우리 기숙사에서 버스 정류장 한 정거장도 안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은 학교였다. 창문마다 각기 다른 악기들을 다양한 느낌으로 연습을 하고 있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 자리에서 나는 별안간 감동스러운 마음에 벅차 올랐다. 이후 나는 별일이 없을 때에도 주말에 종종 제네바 음악학교 복도를 가보았다. 음악 학교 복도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시간을 두고 오래 머물러도 누구 하나 소음을 내며 지나가는 법이 없다. NGO에서 근무를 할 당시에도, 국제기구에서 인턴십을 할 때에도 제네바 음악학교에 잠시 앉아 있다 나오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젊은 음악가들이 담금질을 하는 소리에 내 마음이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현재 고군분투하는 존재는 나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연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제네바 음악학교 복도에서 만나는 풍경들



콩쿨을 관람하는 것은 무료였다. 그래서 마음껏 가볼 수 있었다. 라운드를 거듭하며 탈락자가 결정되는 가운데 내가 응원하던 우승 후보가 실제로 최종 우승을 하기도 했다. 몇년 뒤 한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 비슷한 외모에 기억이 분명히 나는 그 사람의 음성을 듣고 드디어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콩쿨 우승자를 무대에서 찾아내기도 했다. ‘오페라의 주역이 되었구나!’

잘 성장하고 있는 상대를 보니 내가 다 뿌듯했다. 여전히 가끔씩 들르는 제네바 음악학교의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쇼팽의 슬로우 무브먼트가 마치 아이스링크를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진주알 같았다.

이후 여행을 다닐 때도 차비를 아끼고 더 많이 걸어다니며, 밥값을 아껴 조금 저렴한 식사를 하면서도 여행하는 그 도시의 명문 오케스트라의 음악회를 갔다.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세끼를 모두 빵 한 조각씩으로 아껴먹고 남은 여행비로는 보르도 그랑 떼아트르에서 연주하는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에프의 <피터와 늑대> 연주를 봤다. 중학생이 된 언니들이 듣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 음반에서 나오던 악기들과 그 악기들이 제각각 다르게 표현하는 느낌과 고유한 소리를 소개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피콜로!’ 외치며 악기를 소개하던 그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하다. ‘교활한 늑대의 발걸음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니!’ 어린 나에게는 마냥 신기한 일이였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호스텔 운영자들은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이어 공지를 했다. 하수도가 망가져 샤워를 할 수 없다고. ‘오, 괜찮아요. 샤워는 이틀쯤 안해도 됩니다.’ 그렇게 유스호스텔에서 반액 환불받은 숙박비로 파두 연주를 보러 갔다. 어떤 종류이든 음악은 몹시 놀라우며 감탄할만한 데가 있었다. 몰두하고 있는 연주자들을 보면 경이로운 지점이 있었다.



어렵게 구한 국제기구 인턴십을 힘겹게 따라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조금 숨 쉴 틈이 생겼다. 왜냐, 제네바의 겨울에는 명백한 즐거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디망쉬 콘서트. 연회장처럼 멋들어진 건축물과 탄성이 쏟아질 법한 화려한 샹들리에가 가득한 음악당 빅토리아홀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연주하는 주말 콘서트이다. 제네바시에서 주관을 하고 후원까지 하는 이 클래식 공연 시리즈는 4달에 걸쳐 매주 일요일 오후에 연주를 하는데, 프로그램이 때로는 오르간, 때로는 오케스트라, 때로는 성악이었다. 겨울이면 내가 불과 25프랑에 로얄석을 차지할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정규 프로그램에서는 5배 가격쯤으로 겨우 구할 수 있는 티켓이다. 능력치가 높은 동료들과 함께 인턴십을 하며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부대끼고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중, 음악은 내가 유일하게 저속 충전을 할 수 있는 장치였다. 제일 좋은 자리에서 음악회를 관람하려니 세상의 모든 것이 별안간 훌륭해 보였다. 곧이어 음악이 창조하는 신묘한 세계로 빨려들어갔다.

무대 위에서 연주자의 드레스가, 트럼본이 반짝였다. 저렇게 멋진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음악을 연주를 하는 이들이 마치 공들여 세공한 다이아몬드같아 보였다. 보석같은 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이리도 정교하게 연주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천천히, 걷는 속도로 - 안단테의 리듬으로 충분히 감격하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쌓여 시끄럽게 어울릴 때는 몰랐다고. 나의 순간 몰입도가 언제 발휘되는지 나는 미처 몰랐었다고. 관객을 비추는 조명이 어두워지고 모두들 숨죽여 조용히 음악에 몰두할 때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을 때, 그저 무대의 퍼포먼스를 바라보며 연주를 들을 때 한없는 감격이 다가왔다는 것을. 사람들을 물리치고 얻어낸 결단코 조용히 울리는 내면의 평화였다.

곧이어 어느날, 나는 기숙사 주소로 보내진 뉴욕발 소포를 받는다. 뉴욕에서 가깝게 지낸 박상미 작가의 신간이었다. 책의 제목은 <취향>, 뒷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름다운 취향은 어디서 오는가. 느끼고 배우지 않는 인간을 상상할 수 없듯이, 미적 경험과 교육으로 연마되지 않은 취향이란 없다!' 정말 근사했다. 나에게 에드워드 호퍼를 알려준 작가, 미술을 소개해 준 한 아름다운 인물이다. 박상미 작가가 여기서 말하듯 '미적 경험과 교육으로 연마'하는 과정 중 나는 우연히 나의 comfort zone을 찾아낸 것 같다. 무럭무럭 자라난 '취향'은 덤이다.

얼마 뒤 소득이 생기고 경제 규모가 조금씩 쌓여갈 즈음 나는 제네바 그랑 떼아뜨르 오페라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 선생님을 찾아가 내게 성악을 가르쳐 달라고 설득했다. 그리고는 그의 제1호 비전공자 제자가 된다. 발성과 호흡을 처음부터 새로이 배우고, 성량을 키워나갔다. 소리내는 방법에 대해 조금씩 알것 같았다. 하.지.만. 그해 부활절에도 내가 맡은 솔로곡은 여전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묘사하는 애통으로 가득한 곡이었다. 이쯤에서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슬픈 곡을 슬프게 소화하는 것도 재능이고, 취향이고, 그것도 나름 아름다운 거라고. 모든 사람이 무대를 휘몰아치는 카리스마를 꺼내놓으면 곤란하다고. 아주 쓸쓸한 한 줄기 빛을 소화하는 것도 의외로 멋진 일이라고 말이다. 그제서야 썩 마음에 들었다. 비로소 나는 comfort zone에 자연스럽게 쏙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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