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 지줄대는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고난 속의 무급 인턴십을 계속해도, 매일같이 퇴근 후 가방을 풀고 기숙사 주방에 앉아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고생담이 쌓여가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단 1분도, 단 1초도!
안 통하는 언어로 일하느라 매일같이 애를 먹었다. 업무 노트에는 공부해야 할 많은 것들을 꼬박꼬박 적어 놓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분야의 어려운 연구들은 그저 한 문장을 읽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작은 일에 진을 뺐다. 이 망할 놈의 오존, 오존에 대한 논문을 읽어본 사람이 대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냐 말이다? 안 그래도 오존은 파괴되어 가고 있는데 내가 하도 논문에 대고 저주를 퍼부어서 급박한 환경 변화를 더욱 촉진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목차와 제목만 읽고 넘긴 많은 자료들을 총동원하여 풍월을 읊었다. 얇게 체면치레를 할 정도까지만.
그 해 스웨덴 왕립 과학원에서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미합중국 부통령 출신인 앨 고어와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를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세계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을 많이 알린 공로를 인정받았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는 IPCC는 세계기상기구(WMO)와 국제연합 환경계획(UNEP)이 공동으로 조직한 기관이다.
IPCC는 세계기상기구의 3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나는 기후변화에 관련한 컨퍼런스를 조직하는 팀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고, 이 곳과는 간접적인 교류가 있던 팀이다. 여기서 ‘간접적인 교류’에 덧붙여 가장 중점이 되는 나의 개인적 용무는 명확했다. 나는 그 사무국 사람과 만난 적이 있다. 나의 이력서를 깨끗하게 출력하여 오른손에 들고 이곳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잊지 않고 한 번씩 해오던 일이다. 이미 익숙해진 출근처이지만 가끔씩 빌딩의 전층을 돌며 이력서를 낼 곳이 어디 없나, 산책 삼아 다른 층 복도를 걸어 다니면서 몇 층에 어느 부서가 있는지 사무실 문 밖에 붙어 있는 사람들의 명패를 보고 다녔다. 뭄바베 같은 아프리카식 이름도 보이고, 뉘이엔 같은 동남아시아식 이름도 보였다. ‘4층엔 중국인들이 특히 많군.’ 각자의 사무실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운용이 되었다. 어느 방은 초록색 화초가 가득하여 업무 책상이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우거진 숲처럼 꾸며져 있어, 새 한마디만 풀어 놓으면 마치 야생의 정글 같아 보일 정도였다.
이따금씩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근무를 하는 인물들이 있으면 눈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심심해하는 사람들은 매일 같은 얼굴을 상대하며 지루해하는 참에,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순회하고 있는 동양의 얼굴을 한 인물의 존재를 궁금해했다. 얼굴을 빼들고 말을 걸기도 했다. ‘누구 찾아요? 도움이 필요한가요?’ 곧이어 이들을 종종 카페테리아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내가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본인들이 업무차, 혹은 안부차 누군가를 만날 때 나를 그 자리에 함께 불러주기도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아직 뚜렷한 결과는 없지만.
때로는 시간이 얼른 지났으면 바랐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간이 느리게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다. 무급 인턴십의 시간은 분열적인 면이 있었다, 여러모로. 얼른 끝내야 미션을 완수 하지만, 이 시기가 끝나고나도 약속된 자리가 없으니 이 미션은 천천히 겪어야 하는 일인가. 인턴십을 알차게 마치더라도 이 기관에서 6개월 이후까지는 고용할 수 없게 전면적인 인사룰을 정해 놓았으니 시간이 서둘러 달려야 하는 것인가. 아, 모르겠다. 미래를 계산 하기가 힘이 들었다.
다시 막막한 기분이 부지불식간 슬며시 올라왔다. 그런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으로 가야겠다’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되돌아보니 지금껏, 단 한순간도 떠나온 곳을 향해 향수의 감정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를 지줄대는’ 그곳을 향해 아쉬움을 가득 담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왜일까.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는 조직만의 공통의 문화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어쩐지 겉돌았다. 어느 곳에서도 안착했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주류는 있었고 이들만의 카르텔에 난 끼지 못했다. 너는 뚜렷한 장점이 있어,라고 말하지 않는 공통의 문화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단점은 어김없이 회자되었다. 타인의 재능을 먼저 발견해 주지 않는 그 혹독함이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불시에 자격 심사를 받는 기분이 어김없이 들었다.
밤늦도록 회식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속마음을 터놓았다고 해도, 모래알처럼 부서지던 그 인간관계들이 그립거나 아쉽지가 않았다. 어떤 문화의 안정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인간이 옛이야기를 지줄댈 때는, 곱고 보송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법이다. 한국에 많은 것을 내려놓고 떠나온 사람들과는 나는 많은 것이 달랐다. 혈혈단신이며, 애초에 가진 것이 없어서 포기할 것도 없었다. 떠나올 때 꼬리를 바짝 자른 사람이 겪는 고생담이란, 애초에 노스탤지어가 결핍되어 있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곳이 ‘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수많은 언어와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마주하니 새로 알게 된 한 가지가 있다. 향수병에 관한 매우 결정적인 요건을 포착하게 되었다. 나는 비교적 가볍게 여기는 특정 분야가 있었다. 고추장이 없어도 식단에 아무 불만이 없다. 간이 짜면 섞어 먹고 싱거우면 드레싱을 첨가하고, 느끼한 음식이든 뭐든 뜨겁지만 않다면 아무거나 잘 먹고 가리는 음식이 없다. 반찬 투정을 평생 동안 해 본 적이 없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이 같은 사례는 흔치 않았다. 한국인뿐 아니라 스페인 친구나 일본인 동료는 본국의 음식에 대한 애착이 무척이나 강해서 현지 음식을 절대적으로 적은 종류의 소량의 섭취만을 용인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감성이었다.
물론 내게도 가끔씩 행운이 찾아오기는 했다. 어쩌다 운 좋게 고추장을 얻게 되는 날이면 오이 피클을 잘라 마구 섞어 먹곤 했다. 새콤하니 김치 대용으로 쓸만했다. 당연히 예민하거나 절대적인 미각이 없어서 적당한 포만감에도 만족도가 높은 편이었다. 멀리멀리 맛집을 찾아다녀본 기억이 없다. <김밥천국>이 제일 맛있다. 나는 음식에 대한 굳건한 노스탤지어가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무덤덤한 미각으로는 향수가 밀려올 틈이 없었다. 본향 음식에 대한 기호가 매우 강한 사람들은 그만큼 타향살이를 고달파했다.
하긴, 나도 향수가 있기는 했다. 이따금씩 합정동 내 공간에 두고 온 수많은 책들이 간절히 생각나는 것이었다. 나의 해외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여, 차마 기약을 하지 못한 채로 친구가 잠시 이어받아 살고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소설책과 에세이, 그리고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가득했지. 친구들은 내 책장을 가리켜 ‘저널리스트의 책장’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내 스스로를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업계의 언저리에 있으면서도 자신감을 얻지 못했고, 잡지 출판사에 있을 때엔 본인만의 기획력과 본인만의 고유한 문체를 가진 이들을 동경하고 따라가고자 분투했지만, 그러한 기쁨은 끝내 내 몫이 되지 않았다. 늘상 무언가 의심을 걷어내지 못해 내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과 결함만을 봤다. 나조차 자신의 성장 속도를 믿지 못하여 스스로를 채근했다. 신입으로 겪은 경험이다.
‘조금 더 뻔뻔하게 살 걸.’ 이제 와서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책을 읽으러 매일같이 출입하던 홍대 재즈 음반점 <애프터 아워스>도 많이 생각이 났다. 원고를 마감하러 음반 매장에 가서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애꿎은 <애프터 아워스>의 믹스 커피를 많이도 꺼내 마셨지. 내가 쓴 인터뷰 대본들은 모두 <애프터 아워스>에서 탄생했다. 책장을 넘길 때 들리던 소리, 종이의 질감, 칙 코리아의 연주, 재즈평론가 황덕호 씨의 낮은 목소리. 이런 것들이 가끔씩 생각이 났다. 나는 시각, 공간적인 자극과 소리에 대한 예민함이 높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소중하게 모은 저자 사인본들은 소실되지 않고 무사히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지. 갑작스러운 걱정이 밀려왔다. 나도 한국에 놓고 온 무언가가 있다는 자각이 별안간 들었다. 소설책이 가득한 나의 책장.
뉴욕으로 휴가를 가는 이에게 책 한 권을 부탁했다. 그가 뉴욕 한인 타운에 위치한 한국 서점에 부랴부랴 들러 내가 부탁한 소설책을 구해 주었다. 그리하여 제네바에 도착한 책은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였다. 꼭꼭 씹어 한 차례 읽은 뒤, 다시 한번 더 읽었다. 부드러운 종이가 제본이 되어 페이지마다 다른 상상을 펼쳐놓는 책의 비현실적인 물성이 좋았다.
한국 소설이 너무너무 읽고 싶을 때엔 가끔씩 YES24 웹사이트에 들어가 ‘미리 보기’로 신간 소설책들을 딱 20장씩 읽어갔다. 겉표지와 뒤표지를 합쳐 ‘미리 보기’가 허가된 정확히 스무 장을 읽어나가면 한글 활자와 문학을 몹시 바라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해갈이 되었다.
그 후, 그저 나는 이따금씩 엄마에게 엽서를 한 장씩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소설가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에는 엄마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한국에 두고 온 그리운 인물이 생각난 것이다.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그 존재는 엄마였다. 그때 생각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 국제기구에 입사해서, 내게 수입이 생긴다면, 엄마를 초대해서 스위스에서 함께 휴가를 보내야지. 둘이서 스위스의 설산에도 가고 좋아하는 미술관도 가야지. 이같이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일은 성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