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보다 하등 하지 않다
어느 날이었다. 섭외한 게스트가 방송국에 도착하지 않아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잘 오고 계십니까?” 그는 다짜고짜 내게 고함을 질렀다. 찾아오는 길에 길을 잃은 것이다. 황급히 나가보니 그는 번화가에 서있었고 다가오는 나를 보자마자 내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시끄러운 소동을 쳐다보며 그 자리를 비껴갔다. 잔뜩 화가 나 있는 그를 달래기 위해 몇 마디 건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격한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급기야 내게 손을 올리며 때리는 시늉을 하더니 쌍욕을 퍼부었다. 나는 그 앞에서 쩔쩔맸다. 나는 업무 중이고, 방송이 펑크 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성질을 내다 가버렸다고 하자 PD는 내게 펑크 난 방송분을 알아서 메꾸라고 심상하게 말했다. 사람 많은 대로변에서 그에게 맞을 뻔했고, 구경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욕설을 들었다고 구술하는 걸 PD는 아예 모른 체했다. 나더러 그저 참으라고 했다.
‘그래, 조용히 넘어가는 게 모두를 위해 평화로운 수습 방식이겠지.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나는 그때 결심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이 일은 그만둬야겠다고. 나를 동료라고 생각했다면 결코 저렇게 태연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모든 모욕감을 짊어졌다.
아름다운 프랑스 문학을 번역하는 작가인 그 평론가는 여전히 수려한 문체로 글을 써서 책을 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두 얼굴을 기억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의 책을 더 이상 안 읽는다. 손을 올리며 쌍욕 하던 그의 번역문이 아무리 훌륭해도 나는 그의 글을 펼치면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매우 그럴듯한 수사 안에서 비집고 튀어나올 나의 비애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당시 느꼈던 처참한 기운은 여운이 길었다.
세월이 흐르면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희석된다고들 하는데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촌스러운 헤어스타일과 말투로 말하는 옛날 드라마 <보고 또 보고>를 10년 뒤에 다시 틀어 놓고 쉼표 없이 대사를 쏟아놓는 푸닥거리를 보고 또 보는 것처럼, 그 당시의 이 장면이 영화 필름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 축소되거나 압축되지 않은채. 단 1초의 편집도 없이 고스란히. 내가 그 기억을 정리하나 봐라.. 과연 ‘분노는 나의 힘’이었다.
오만한 PD들도 때가 되면 세월호 참사 특집 방송을 하고 쌍용차 부당해고에 반발하는 희망버스를 타고 취재를 다니며 책을 쓰기도 했다. 원래 그렇다. 옆에 있는 인간의 소소한 슬픔은 모른척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그놈의 ‘대의’가 중요하지. 아니, 본인의 유명세가 각별히 중요한 건가?
한 번은 작가들의 월급이 체불된 적이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입금 계좌를 매일같이 확인해 보았다. 카드값과 공과금을 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 PD들 중 누구도 경영진에게 대신 항의해주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정규직들을 돌보기만도 벅찼다. 나는 이들의 ‘동료’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냥 당하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아무도 내게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겪어야 했다. 포장지만 예쁜 프리랜서 작가의 세계는 현실이 이러했다.
주변의 재능있는 작가들은 환송 인사도, 송별회도 없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휴대폰 외장 배터리를 세 개씩 들고 다니던 시절이다. PD가 한번 전화를 하면 나는 한쪽 귀가 뜨거워질 때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길에서건 지하철에서건. 당시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강박이 생겼다. 아파서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옆집 현관 벨소리였다. 곧이어 한국을 떠난 뒤 휴대폰 없이 1년을 지냈고, 향후 몇 년간은 외출 시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상처가 되었던 그 기억이 이제 제네바의 국제기구에서 내게 맷집으로 혹은 내공으로 작용한다니 웃음이 나왔다. 불안했던 글쓰기 노동자의 삶을 즐겁게 견뎠기에 이 멀리 외국에서 무급 인턴십도 꿋꿋하게 해내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발끝으로 간신히 서있는 발레리나는 무게의 중심을 정확하게 잡고 있어야 한다. 다 겪어본 일이라 쿠션이 제법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던가보다. 뚜렷한 소속기관이 없다는 것, 보호장치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 카운트되지 않는 무명의 단기 근로자라는 것.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기억은 내게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좋아하는 일이라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애정을 품고 있던 그 삶을 던져 버려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공력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그 누구보다 하등 하지 않다. 나를 연약한 존재로 명명하지 마라. 주변인들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팩트는 변하지 않는다. 내가 일군 이 모든 것은 나의 재산이고 내 경력이다. 어쨌든 많은 이들은 내가 연구해가며 공들여 쓴 원고를 읽었고 무사히 방송 송출이 되었고, 작가가 구상한 대로 움직였다. 누가 공로를 인정해주지 않았어도 나는 나름의 기획력을 쌓아갔다.
방송 진행자는 이러한 나의 갈증을 포착하고 방송 말미에 늘 내 이름 석자를 언급해 주었다. 그 음성이 힘을 주는 날들도 많았다. 고마웠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 같았다. 나는 불안한 한 시절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재밌는 일이다. 권력은 실시간으로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시간대에 따라 서열을 고쳐 매겼다. 권력이란 유기체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참으로 힘에 민감했다. 지켜보던 내가 배신감이 들 정도로. 이들에게는 위-아래만 있을 뿐, 동료나 파트너를 대하는 매너는 결여되어 있었다. 인사를 ‘받는다’는 표현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도 나만의 ‘곤조’는 있었다.
‘예의 없는 자에게 자비는 없다.’
힘에 민감한 이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실무를 감당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방금 전 머리를 조아렸던 권력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본인이 눈길도 주지 않고 하대를 하던 실무자들이 일을 성사시킨다. ‘이름’만 올린 사람은 실무적인 일을 구현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손을 빌어야 한다고. 그리고 또 하나, 실무자들이 한세월 그 자리에만 있을까? 아니! 이들도 조만간 자리를 옮기고, 누군가를 기용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간다.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은 실무를 담당할 때 잊지 않고 한 일이 있다. 촘촘한 치부책을 작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일을 하청 하는 오늘의 인간이 내일은 당신의 이력서를 검토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외지사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필요 이상의 서열주의가 나는 불편했다. 나는 결코 하등 한 인간이 아니다. 그동안 남의 인정에 너무 많은 것을 걸었다. 달라져야 했다. 아예 사람 욕심을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인정에 대한 욕구가 발목을 잡았다. 누군가의 선택을 필요 이상으로 갈구하다 보면 늘 탈이 났다. 상대방도 사실은 힘을 건사할 줄 모르는 미진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마주하는 모든 이와 눈을 맞추고 공평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결코 이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면 그중 가장 서열이 높아 보이는 ‘대장격’의 1인과만 악수를 한다. 나머지는 ‘병풍’ 취급을 한다. 나는 순서를 전복해 보았다. 무리들과 인사를 할 때 서열을 거꾸로 뒤집어 제일 끝에 있는 인물들과 먼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 명씩 악수를 하고 눈을 맞추며. 병풍 취급받던 사람들을 앞으로 드러나게 예우하는 동안 서열 1위는 기다려야 한다. 늘 극진한 대접을 받는 일인자도 때로는 박탈감을 느낄 필요가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견고히 쌓아놓은 그 순서를 전복해 보는 거다. 사람들이 자존심처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권위라는 것, 순차라는 것을 숭배하지 않으면 된다. 남이 설정한 계보를 하늘처럼 모실 필요를 알 수 없다. 위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찰라의 한순간이었다. 모퉁이 돌 하나만 빼도 힘의 중심은 기울어진다. 그 방법은 꽤 단순하다. 상대방이 모두를 평등하게 대접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으로 보여준 구체적인 예시가 있었다. 방송국에 출연자로 온 분들이었다. 인터뷰가 잡혀있었다. 그날 나는 이들의 성숙한 태도에 감동을 받았고, 오래도록 그 장면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스튜디오에 도착한 재즈 가수 나윤선 씨는 방송 조정실 콘솔 앞에 앉아 있던 엔지니어 한 분, 한 분께 모두 인사를 마친 후, 작가인 내게도, CP인 PD에게도 그리고 한켠에서 다음 프로그램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리포터에게도 모두 빠짐없이 ‘초대해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모든 이들에게 각각. 이런 일은 드물게 벌어진다. 보통의 경우 출연진은 PD와만 대표로 1회 인사를 한다. 나머지 스태프는 정물화의 배경에 등장하는 창틀쯤으로 치부된다. 방송이 끝난 후 나윤선 씨는 다시 이 모두와 차례차례 감사 인사를 나눈 후 출입구까지 배웅하는 나와 인사를 마치고 떠났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또 한 명의 인물은 방송 출연 전과 후 모두 동일하게 훌륭한 매너를 보여준 뮤지컬 배우 남경읍 씨였다. 등장부터 달랐다. 조용히 매니저도 없이 입장했다. 본인이 미리 출력해온 원고를 고요하게 품에서 펼쳐 꺼내 들고 다시 조용히 검토했다. 까마득히 어린 친구가 건네는 차 한 잔을 두 손으로 받았고, 감사하다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말끝을 흐리며 반말을 하거나 껄렁거리는 이상한 농담 따위는 던지지 않았다. 알려드리는 안내 사항을 모두 깍듯하게 경청했다. 그야말로 품위 있는 인물이었다.
두 분 모두 무대 공연을 하는 인물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한 씬(scene)에 들어있는 모두의 몫을 인지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내가 받아들일 몫은 반면교사를 인식하고 옳은 것을 습득하는 것이다.
국제기구 인턴십을 하는 중 한국에서의 사회생활 경험을 떠올리니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래도 먼 길을 왔구나. 앞으로 더 먼길을 가야 하지만 꼬꾸라지지 않을 정도의 균형 감각을 내재하고 힘을 내보기로 했다. 균형감각엔 이것도 포함이다. 나는 결코 하등 하지 않다는 믿음. 나라는 인격은 권력의 일인자와 대면해도 동등하다는 사실.
예의를 갖추고 매너를 겸비하는 것을 필수다. 하지만 힘 있는 자 앞에서 굽실대는 것은 하지 말자. 한국에서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때의 비통함이 고스란히 올라왔다. 쓴 물을 이렇게 오래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나도 그 ‘권력 감옥’을 꽤 오랫동안이나 기웃거렸던 모양이다. 감옥의 죄수가 되고 싶어서 안달했던가 보다.
나는 누구와 비교해 덜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대등한 인간이 되어 보기로 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천문학적 금액을 만지는 스위스 은행의 CEO 앞에서 나는 이 같은 결심을 마음속으로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