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를 해가며 지속하는 일상
제네바 빠끼에 있는 베트남 식료품점에 갔다 왔을 때 일이다. 규격에 맞춰 반듯하게 정돈된 심심한 스위스의 수퍼마켓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재밌는 분위기가 그곳에 있었다. 다양한 동남아시아의 식재료들이 냉장고에 어지러울 정도로 가득했다. 입구부터 향신료의 냄새로 꽉 찼다. 냉동 파파야와 피시 소스 등이 보였다. 목소리가 와일드했던 여자 사장님을 지나치며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채소들이 싱싱해 보였다. 얼굴을 들이밀고 시원한 냉장고를 샅샅이 탐색해 가며 발견한 채소가 있었다. 미나리!
그런데 낭패였다. 집에 가져와서 친구에게 보여주니 미나리가 아니란다. 분명 미나리처럼 보인 풀이었는데.. ‘미나리다.’ 하며 반가운 마음에 의심도 않고 곧장 집어 들었는데.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내 표정을 보며 웃던 친구는 이파리를 한 장 뜯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깨물고 씹어보라고. “미나리 아니잖어! 그럼 이건 뭐지?” 끝까지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이름 모를 식물이었다.
인생은 이래서 재밌다. 기대와 실망과 어색한 깨달음으로 점철된다. 인생이 통째로 이렇게 이어진다.
일상이 매번 이랬다. 저절로 얻어지는 게 거의 드물었다. 이렇게 내 두 손에 잡힌 새로운 소재들을 조금 뜯어서 맛보고 알아차리는 과정이 있어야 겨우 한 가지를 체득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시장에서 파는 초록색 풀이 모두 시금치인 줄 알았으니 조금 나아진 게 이 정도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사소한 발전이 있었지 않은가. 미나리’처럼’ 생긴 걸 한 번은 골라봤기에, 다음에 장을 보러 가면 ‘아, 저거 미나리 아니었지!’ 할 수 있다.
한국을 멀리 떠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딛고 보니 인생을 헤쳐나가며 나라는 존재가 체험으로만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질감을 경험하는 것 같다. 앞이 캄캄할 때가 있다. 그걸 매끈하게 넘겨야 한다. 낙관적이라서가 아니라, 유연해야 이 난국을 깰 수 있다. 때로는 그랬다. 어떤 테스트의 한 복판에 내가 놓여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늘에서 목소리가 나타나 묻는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
이걸 얼른 넘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산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아서 직접 겪어야 했다. 해치우자는 마음으로 살았다. 나 스스로 시작한 일이니까. 그래서 그늘도, 주름도, 생채기도 얼른 털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했기에 헤엄쳐 나갈 힘도 생겼다. 이상하게 힘이 났다. 많은 것은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체감했다. 조금씩 기술이 늘고 담대해졌다.
이력서를 매일 새로 고쳐 쓰고 새 종이에 프린트해서 가지고 다녔다. 모르는 사람을 수소문해 찾아다니며 지치기도 했다. 구직은 어떤 상황에서도 힘들다. 때로는 면전에서 안 좋은 말을 듣기도 했다. “이 건물에 어떻게 들어왔어요?” 외부인을 경계하는 예의 없고 서늘한 응대를 받았다. 때는 세계경제위기 당시였고 그 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한 명씩 잘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앞이 캄캄하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날이 온다.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질러대고 싶은 그런 날에는 정말로 소리를 질렀다. 개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떠나가라 노래를 불렀다. 스위스의 숲에 가서 토로했다. 푸른 숲이 내가 뿜어내는 미친 이산화탄소와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가져갔다. 벤치에 앉아 숲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왔다. 이따금씩 스위스의 포도밭에 멀리 걸어가서 청포도가 주렁주렁 달리고 익어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오곤 했다. 먼 길을 걸어오며 생각했다. 나는 아직 수확의 계절을 보지 않았다고..
갑갑할 때는 서랍을 열었다. 이따금씩 엄마가 보내온 편지를 주섬주섬 꺼내 읽었다. 눈물을 찍어내며 첫 문장을 읽는다. 국제우편으로 도착한 엄마의 편지였다. “애리야, 가슴에 기쁨을 가득 담아라. 어딜 가나 항상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라. 넌 늘 행운아였어. 엄마는 애리를 위해 매일같이 기도한다.”
나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는 엄마. 엄마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나는 망둥이가 되었을텐데. 곧이어 엄마의 편지는 명사들의 주옥같은 명언으로 중반부의 내용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미끄러지듯 자연스러운 전개였다. 어느 날은 루즈벨트 또 어느 날은 링컨이었다. 편지의 후반부는 늘 ‘양치질을 잘해라.’로 마무리되었다. 가족들은 저마다 생업으로 바빴고 이렇게 편지 한 장 눌러쓰는 게 얼마나 공력과 정성이 드는지 내가 모르지 않다.
나는 뜨거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중학생 시절 하교 후 친구들과 즉석 떡볶이를 먹으러 가면 꽤 많이 억울했다. 한창 클 나이의 중학생들이 언덕 위의 학교를 폭풍 수다를 떨며 걸어서 내려가다 보면 평지가 나올 즈음 배가 몹시 고파왔다. 친구들은 맵고 뜨거운 걸 잘 먹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쇠라도 씹어 먹을 듯 치솟는 식욕을 자랑하며 익지도 않은 떡을 모두 다 건져 먹었다. 딱딱해 보이는데도 잘만 씹어 삼켰다. 떡볶이 국물에 같이 담겨 나온 쫄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쫄면이 너무 질겨서 면이 조금이나마 불기를 기다리는 동안 친구들이 익지도 않은 쫄면을 잘도 씹어재꼈다.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픈데 냄비는 이미 바닥을 보인다. 마른 국물 자국과 고춧가루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난 1인분씩 식판에 담아주는 음식을 선호한다.
나는 다 같이 달려들어 마구 엉켜야 하는 일이 맞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성향과 속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헤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은 애써도 나아지지 않는다. 경기 종목을 잘못 선택한 탓이다. 220볼트에 110볼트를 끼우면 기계는 터진다. 전압이 다른 걸 억지로 끼우면 안 된다.
하루는 저녁 초대를 받아 근사한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다. <셰프의 특별 메뉴>가 적혀있는 메뉴판이 있었다. 어떤 재료로 요리한 음식이 나올지 전혀 모른 채 그날 셰프가 마음껏 선택한 신선한 식재료로 음식이 차려진다고 했다. 하얀 테이블보가 환하고 깨끗했다. 테이블보 위에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 두드리며 어떤 일이 전개될지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 이 메뉴를 고르면 셰프가 직접 주방에서 빠져나와 주문한 인물을 찾아온다. 셰프로부터 무슨 질문을 받을지 나는 무척 기대가 되었다.
셰프는 테이블까지 나와 육류를 좋아하는지 생선류를 원하는지 혹시 채식주의자인지만 확인하고 이내 서둘러 요리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돌아갔다. “나를 믿어봐요. 내 프레젠테이션을 기대해주오.” 한쪽 눈썹을 올려가며 보여주는 경쾌한 표정이다. 이외의 것은 서프라이즈다. 셰프가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메뉴이다. 클라이언트에게도 흥미로운 선택이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면서 그 레스토랑에 대한 약간의 신뢰만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
약간의 기대와 약간의 믿음만 있으면 된다.
앞에 놓인 막연한 미래를 상상하며 많은 결정을 하나씩 해나가고 또 발전을 해간다는 건 조금 긴장이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기대와 호기심이 필요한 일이다. 가다 넘어질 수도 있고, 아예 몽땅 망쳤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다 틀렸어, 아주 망했다고!’
그때마다 알아차린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지점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니?’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명백하게 반환점을 넘겼다. 이제는 내가 과연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확인하러 가보는 여정이랄까. 어느새 자신감이 붙은 거다.
20대 후반, 나는 속해 있던 사회를 빠져나왔다. 회사를 그만두고 당분간 한국을 떠나 있을 준비를 했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나의 공간과, 나의 언어를 고이 접어 그 자리에 그대로 놓고 몸만 빠져나왔다. 그것도 편도 비행기 편으로. 분명히 소중한 무엇을 뒤로하고 무모하게 떠나왔다. 마음이 급했다. 시간과 돈을 모두 낭비해 버리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똑같은 자리로 돌아오게 될까 봐.
이 여정에서 나는 홀로 나의 강점과 약점을 적나라하게 마주해야 했다.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시간들이 때로는 험하게 다가왔다. 그 또한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하며 어디에도 숨기지 못할 분명한 콤플렉스를 확인했다. 처참했다. 나는 허점이 많은 인간이었고 익숙한 환경을 떠나지 않았다면 부딪치지 않았을 일들이다. 어느 날인가는 저녁에 통곡을 하고 울다가 다음날 하루 종일 제네바 시내를 걷고 또 걸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마음을 정돈했다.
마치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는 심정으로 샅샅이 헤매고 다녔다. 국제기구 입성을 처음으로 꿈꿨을 때가 생각난다. 준비도 대책도 없이 오로지 생각만으로 결심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손에 잡히는 게 생기고 착각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 거의 다 왔다’고 매일같이 믿었다. 목적지 근처에 도달했다고 매일같이 생각했다. 곧 있으면 의미 있는 무언가를 손에 넣을 수 있겠다고. 나는 나아지고 있으며 상황이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주변에서는 내게 그 방법으로는 안 될 거라고 경고했지만 어차피 시작했으니 멈출 수가 없었다. 앞이 어두워 거리가 가늠이 되지 않아도 나는 나아가고 있으니 어딘가에 닿을 거라고.
앤디는 대학시절 경영학을 공부했지만 한두 해 동안 꾸준히 지질학을 수강했다. 돌이 형성되는 건 시간이 걸린다. 만 년간의 빙하기 이후 산맥이 형성되는 건 백만 년이 필요하단다. 이것은 결국 압력의 문제였다. 그가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어느 날 그는 감방 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려 작은 조각칼로 벽을 긁어낸다. 그때 벽에서 부서져 떨어져 나온 돌 한 조각이 그 모든 스토리의 시작이 된다. 이 일이 그날 밤 당장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는 꾸준히 지속한다. 돌과 석회의 조합이 연약했고, 아무리 콘크리트가 부드러워 긁어내는 것이 가능했어도 27년이 걸렸다. 무려 27년!
하루 한 줌씩 벽을 긁어내 감옥의 운동장에 나가 그 돌가루를 조금씩 뿌렸다. 아무도 몰랐다. 운동장을 살살 걸어 다니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그가 산책을 하는 줄 알았다.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놓은 돌가루 한 줌을 바지 밑단 아래로 떨어뜨려 신발로 작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털어내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쇼생크를 탈출한다. 학생 시절 지질학을 수강했고, 그날 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려고 조각칼을 손에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속한 27년, 자신을 놓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모색할 때 마주한 콤플렉스는 극복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언어에 대한 능력 부족, 인맥이 없다는 콤플렉스, 시작이 늦었다는 기정사실은 자책한다고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다면 비를 맞아야지. 하늘을 원망한다고 비가 멈추지 않았다. 부족한 언어를 덮을 수 있는 다른 주특기를 새로이 필사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문자 그대로 전무하다시피 했던 인맥도 마찬가지다. 그제야 내 고유 영역을 달팽이 걸음으로 아주 조금씩 형성해갔다. 시작이 늦었다는 것은 조금 달랐다. 다양한 분야에서 삽질을 했던 내 이력은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했다.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음식 재료를 다루듯 내 일상을 요리한다는. 프라이팬에 담긴 식재료를 요리해 나가는 과정마다 나의 컬러가 드러난다. 볶든지, 튀기든지, 데치든지, 기름을 끼얹고 불판에서 불쇼를 하든지 수많은 선택을 해가며 간장을 끼얹고 후추를 뿌리며 나의 인생을 조미해 가는 과정이라 믿자.
익숙하고 또 좋아하기도 했던 터전을 뒤로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아예 한국을 떠나 새롭게 헤쳐나가야 했던 순간순간을 나는 이제야 회상한다. 그건 내 앞에 놓인 긍정성과 부정성을 다루는 방식을 깨우쳐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눈 앞에 놓인 어려움은 피할 수 없어서 매번 비슷한 게 또다시 찾아온다. 수많은 양념통에 들어차 있는 조미료를 꺼내어 조합하듯, 냉소적인 마음과 벅찬 마음을 조심스럽게 길들여 간다. 그 과정 중 나의 한계점을 경험해 가며 스스로를 발견한다.
도저히 타협하기 힘들고 결단코 참을 수 없는 근본적인 일들은 애초에 선택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생각도 처음으로 해봤다. 한국에서였다면 멋모르고 겪다가 정신적으로 아팠을 일들이다. 부당한 일을 거치거나 사소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일들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옳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건강에 타격이 왔기 때문이다.
나의 기질도 고약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꼼짝을 하지 못 하고 단 한 발 떼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일순간 납득을 하면 그때는 미친 속도와 동력으로 추진한다. 마음의 속도를 알아차려가며 우물물을 끌어올렸다. 알지 못했던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왔다. 잠자고 있던 가능성을 보기도 했고 스스로의 저돌성에 감탄했다. 결국 내 인생을 동력 하고 있는 엔진이 되어 일상을 꾸리게 되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한 국제기구에서 받은 컨설턴트 3개월 계약, 꿈같은 일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조금씩 인정을 받으며 다시 3개월을 연장했다. 그리고 또 프로젝트를 더 맡고 다시 3개월, 불안함과 막막함을 안고 살았다. 하루는 인사과에서 미팅을 요청했다. 단기 컨설턴트 계약을 이런 식으로 지속하며 회사에서 최장기 계약직 기록을 만들었단다. 누군가 부른 노래처럼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그게 딱 내 마음이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본인의 선택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몰랐을 거다. 앞에 펼쳐질 미래를 모른 채 그저 어처구니없이 가혹한 현실 닭장 속에서 얼른 빠져나오기를 갈망했다. 그 갈망이 마당으로의 탈출을 성공시켰다. 이후 늪으로, 찔레 덤불로, 또 저수지로 여정을 계속하며 마당을 나온 암탉은 세상을 경험하고 다치면서도 스토리를 쌓아간다. 나의 스토리도 마찬가지이다. 끝은 없다. 지속할 뿐. 막막함에 지지 말자는 다짐을 거듭하면서 말이다.
깎아내리는 삶, 없어져 가는 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그날 난 뭐라도 해야 했다. 갈망이었다. 그날 당장 마포구청에 가서 여권을 갱신했다. 이후 갈망은 기대로 변모했다. 자신을 지키고 발견하며 오늘도 이렇게 산다.
최근에 나는 자전거를 배웠다. 중심을 잡고 두 바퀴를 구르는 건 보기보다 어려웠다. 여러 차례 넘어지고 손바닥이 까졌지만 이제는 혼자 출발할 수 있다. 곧이어 수영 강습도 듣기 시작했다. 아직은 물에서 꼬르륵 가라앉지만 언젠가는 바다표범처럼 매끈하고 유연하게 몸을 뒤집을 수 있겠지. 그날을 기대한다.
* 1년 전 나 혼자 시작한 연재 <막막함에 지지 말자>,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약간의 갈망을 주었다면 참 기쁠 것 같습니다. 막막한 마음으로 지금의 하루하루를 살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발견해가며 긍정성을 끌어올리며 반전을 계획한 저의 이야기가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 <막막함에 지지 말자> 매거진 마지막 회를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고 기획하고 있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