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사고였다, 그를 송두리째 바꾼.

초원에서 자란 아이, 프랜시스 (2)

by Aeree Baik 애리백

당시 아버지는 어딘가로 여행 중이었고 간호사인 어머니가 환자를 돌보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고 후 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제네바 시내 병원으로 찾아갔지만 한 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그곳은 의료진 없이 텅 비어있었다. 그날은 하필 의사들의 학회가 있던 날이라 병원에는 안과의사는커녕 응급의사조차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밤중에 11세의 아이와 어머니는 아무런 응급의학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날 밤 프랜시스는 한쪽 눈의 시력을 완벽하게 잃었다. 한 개인의 악몽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 장애인이 된 한 아이.


이야기를 듣던 나는 사고 소식에 너무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인터뷰를 하겠다고 그의 앞에 앉아 그의 구술을 들으며 필기를 하고 있었는데 펜을 그만 손에서 놓쳤다. 나의 마음은 순간 허둥댔다. 그가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는 양쪽 어깨를 정지 상태로 둔 채 ‘얼음 조각’이 된 것처럼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의 이야기를 여전히 경청하고 있어.’라는 메시지를 어떻게든 표현해야 했다.


우리의 시야는 입체적이어서 양쪽의 시야를 함께 갖추고 있어야 앞에 있는 물체가 정확히 보인다고 한다. 프랜시스는 이후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힘들 정도로 한쪽 눈의 부재를 힘들게 겪는다. 3D로 보여야 초점을 명확히 맞출 수 있는데 축구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친구들과 공놀이조차 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그저 나를 그만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어.”

이런 그의 말에 나는 어떤 말로도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덤덤해서, 그리고 내겐 위로의 언어가 없다는 무력감에 조용히 호흡만 쉬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가 갖고 있는 언어란 이렇게도 빈곤했다.


사람들을 위해 하늘의 말씀을 전하고 성당에서 기도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신의 종이면 무엇하나. 11살짜리 아이는 그렇게 하늘에 계신 신을 원망하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방에서 자살시도를 한다. 머리에 비밀봉지를 쓰고 스스로 질식사하겠다고 봉지를 꽁꽁 묶었다.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비닐을 조였다. 죽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곧이어 어머니가 아이를 발견했을 때 어머니는 울며 아이의 어깨를 세게 붙들고 약속을 하라고 한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그러마 어머니와 약속을 한 프랜시스는 그것을 지킨다. 약속을 했으니까.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원칙 때문에 다시는 자살 시도를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하지만 그렇게 불행한 악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통도 장애도 주변의 누군가 덜어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어떤 형태든 희망의 여지가 전무하여 앞으로 겪어야 할 힘든 시간은 그대로 자신의 몫으로 남았다.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한 아이, 자살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어머니와 약속한 아이, 별안간 장애를 얻게 되어 그로부터 17년을 장애인으로 살게 된다. 아이는 아직 어렸고, 첨단 의학이 발전되기 전의 시절이다.


예쁜 얼굴이 모두 망가졌다, 대칭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한쪽의 시선이 잡히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와 대화할 때도 그가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어서 서로가 당황했다. 그 자신도 상대방의 시선에 확신이 없었다. 서로 바라보는 대상이 비껴가면 연결 지점이 포인트를 잃는다. 접점을 잃는 것이다. 1초도 그걸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어머니는 더욱 불행해져 갔다. 히스테리를 부리고 집착을 하며 아들에 대해 자꾸만 심리 조종을 하려고 했다. 너는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톨릭 신부의 아내라는 자신의 처지가 트라우마로 변질되었다. 프랜시스는 왼쪽 눈의 안압 때문에 매일같이 통증을 느낀다.


그 와중에서도 컴퓨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식지 않는다. 어찌어찌하여 어딘가에서 컴퓨터를 사 오긴 했는데 들판만 넓은 초원의 집에는 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 말짱 헛수고였다. 마을의 시장에게 편지를 써서 겨우 성사시켰다. 가까운 이웃의 전기를 끌어다 쓸 수 있게 조치를 마련한다. 그리고는 18살, 그는 집과 부모로부터 독립에 성공한다.

“어떻게?”

“대학을 스위스 제네바로 진학했거든.”

(브라보!)


부모의 영향력을 벗어나 홀로서기를 했다. 대학 진학으로 길이 열렸다. 컴퓨터공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파리와 제네바의 학교를 저울질하다 두 가지의 선택 중 부모가 납득하고 안정감을 느낄만한 옵션으로 제네바 대학 진학을 결정을 한다. 경제적인 선택이었다. 파리는 너무 멀었고 그는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한 시간 내외의 프랑스-스위스 국경을 넘었을 뿐인데 그는 평생 처음으로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새 인생을 창조했다. 마을의 성직자이자 교육자인 아버지와 마을 모든 이들의 간호사인 어머니가 세운 영역을 용감하게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제 막 대학을 진학한 청년은 아직 스무 살이 채 되게 전에 머리가 하얗게 샜다. 불과 16살에 새하얀 머리카락을 갖게 된 아이는 청년이 되었다. 내가 처음 프랜시스를 동료로서 만났을 때 하얀 은발의 근사한 리처드 기어가 내게 웹 에디팅 교육을 해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모습이 자그마치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완성이 되었다니 아직 어린 청년이었을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 미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안구 주변에 오는 고통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같이 지속되는 통증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사고 후 단 하루도 멈추지 않던 통감을 알코올의 힘이 나서서 덜어주었다. 그는 술이란 걸 처음 발견하고서 너무나 기뻤다고 한다. 고통에서 편해질 수 있어서. 약간의 마비를 즐겼다. 알코올이란 너무나 획기적인 물질이었다. 이후 10년 뒤 러시아에서 수술을 받게 된다. 이식 수술을 받아 새 눈을 얻었다. 17년간의 장애 인생이 종지부를 찍는다.


이야기를 계속하며 그는 내게 말했다. 어떤 심리책은 그렇게 말하더라고, 장애인들의 멘탈은 엄청나게 강하다고. 타인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점차 적응해나가며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어디 쉽겠느냐고. 도약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이렇게 이 모습으로 인생을 지속해야 하는데.


그는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또한 누군가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그러면 자살하기도 하겠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애매하게 약간의 시니컬함을 섞어 말하는 그를 나는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나는 아까 11살의 아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대목에서부터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기 때문이다. 프랜시스는 자신의 테이블 매트 옆에 놓여있던 냅킨을 집어 조용히 내게 건넸다.


내가 그의 앞에서 울음을 참느라 눈을 깜빡이며 애쓰고 있던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사실 오늘의 만남은 이것 때문에 성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나는 인생 처음으로 불행하다 느낀 시절이 있었다. 오랜 시간 분투와 고생 끝에 국제기구 정규직에 드디어 합격하여 한껏 기뻐야 할 순간에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 어떤 일들은 그저 불가항력으로 자신을 옥죈다. 답이 없다. 그렇게 무력감을 경험한다.


내겐 일종의 강박이 있었다. 약해진 감정을 직장에서 흘려 보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약점을 드러내는 건 더더욱 안될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건 결코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선입견이 강한 나였지만 이때 그 금기가 맥없이 풀렸다. 내 힘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겪던 중이었다. 나는 마치 물속에 잠겨 숨도 쉬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수풀과도 같았다. “나는 지금 덫에 물린 것 같아.” 물속으로 빨려가는 일만 남았다 생각했다. 그때 그가 내 앞에 있었다. 신은 11살짜리의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게 가장 중요한 시점에 그가 나의 상담자가 되어준 사연이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당신이 막막한 마음에 지지 않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심드렁한 척, 괜찮은 척, 때로는 성급히 꾸며대며 아닌 척 회피한다고 절대 없어지지 않는 그 막막함 말이다. 그는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