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프랑스 변방의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

초원에서 자란 아이, 프랜시스 (1)

by Aeree Baik 애리백

프랑스라고 하면 모두들 파리를 떠올리겠지만 프랜시스는 프랑스에서도 변방 시골 지역에서 자라났다. 스위스 제네바와 국경 지역에 인접한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인구가 1만 명도 채 되지 않은,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시골 동네였다. 누구에게 말해도 아무도 모를 그런 작은 마을이다. 설령 프랑스인이어도 말이다. 그러니 그가 국제도시인 제네바의 특수성과 폐쇄적이고 소박한 프랑스 시골의 두 문화에 모두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프랜시스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특수한 환경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천주교 신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간호사.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는 질문을 했다. “신부님? 아버지가 신부님이셔? 가톨릭 신부님이 결혼을 하신 거야?”


바티칸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한시적으로 천주교 신부들의 결혼을 허용한 적이 있었는데 프랜시스의 부모는 그 시기에 가정을 이루었다. 프랜시스 양친의 부모는 양쪽 모두 매우 엘리트였고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봐도 가문은 무척 독실했다. 특히나 아버지 쪽은 특허를 여러 개 보유하고 있는 이름있는 발명가 집안이었다. 두 분 모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가정부와 가정교사를 두며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전쟁으로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그 모든 것을 잃었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다. 프랜시스는 그러니까 영광의 상처뿐인 부모 밑에서 그것도 가톨릭 신부님의 아들로 자라난 것이다. 그의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는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아프리카에서 한때 선교사 부부로 지낸 부모님은 어느 해에 크게 열병을 앓다가 건강을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아프리카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정착한 곳이 이 작은 마을이었는데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이 사는 방식 그대로 옮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기도, 티브이도, 수도 연결도 없이 프랜시스를 키웠다. 직접 나무를 잘라 오두막을 짓고 숲과 강 사이에서 사회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초원의 아이였던 프랜시스는 행복했을까, 이런 생각에 나는 잠시 그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3000 sqm이나 되는 드넓은 초원에는 말과 당나귀와, 고양이와 거위들과 개들이 뛰어다녔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이는 결핍을 느꼈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프랜시스는 문명이 그리웠다고 한다. 바로 옆 골목에는 또래의 자녀 셋이 있는 영국인 엔지니어 가족이 살았는데 아이 한 명당 컴퓨터가 한 대씩 있었다고 한다. 어린 프랜시스는 그걸 몹시도 부러워했다. 옆 골목의 가족은 부부가 모두 CERN(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 지역에는 CERN이 있고 근방에는 CERN에서 연구하는 수많은 물리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거주한다. 프랜시스의 유년시절에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괴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프랜시스의 어머니가 방문 간호사로 여러 가정을 다니며 진료를 하고 나이 든 사람들을 돌보다 프랜시스의 하교 시간이 되면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아이를 픽업하여 데리고 다니며 다시 다른 가정을 돌며 환자들을 보살폈다. 프랜시스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내 유년 시절은 환자와 동물들로 가득했어.” 아픈 사람들과 말 못 하는 동물들 말이다. 나는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의미를 가늠해보았다. 평범할 수 없는 삶이었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농장에는 승마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주말마다 근처 마을의 어린 여학생들이 승마를 하러 왔고, 신부님인 아버지가 여름방학마다 초청한 가톨릭 형제, 자매들이 온 나라에서 모이기도 했다. 브라질, 피지, 중국 등 다양한 인종과 국적으로 농장이 붐볐다. 집은 그야말로 초국적인 환경이었다. 프랜시스는 학교 친구들이 영위하는 보통의 삶이 부럽고 또 부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티브이를 보고 피자를 시켜 먹는 그런 평범한 삶을 동경했을 것이다. 그런 소박한 바람은 멀고도 멀어 보였다. 그사이 아버지는 그 마을의 음악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


그가 어머니를 회상할 때는 고운 얼굴로 증언하지 못했다. 네 살 때의 기억을 내게 이야기했다. 첫번째 사고라고 말했다. 마치 사고들이 더 벌어질 것처럼, 앞으로 벌어진 파란만장한 사연들을 암시하는 말로 들렸다. 어머니는 재능이 있는 화가였고 엄마가 그림 그리는 공간에는 아프리카를 떠날 때 챙겨 온 소중한 담요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담요에 네 살짜리 프랜시스가 중국 수묵화에 쓰이는 먹물을 쏟아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아끼던 담요엔 새까만 얼룩이 물들었다. 놀랐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실수였다.


어머니는 프랜시스의 뺨을 세차게 때리고 또 때렸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들을 향해 뚝 그치지 않으면 계속 뺨을 때리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으름장을 놓았고, 공포에 질린 프랜시스는 뺨을 맞지 않기 위해 숨을 참으며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네 살 때의 기억이다.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내 감정을 강제로 통제해야 했어.”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이 에피소드를, 아프리카에서 온 어머니의 담요를, 자신의 실수를 돌에 새긴 조각처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아주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걸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살면서 사람들은 특정 기억에 사로잡히게 된다. 뺨을 맞던 네 살짜리 아이는 그의 마음 속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겁을 먹은 아이의 모습이 그 장면 그대로 멈춰져 있다.


그러던 중 더 큰일이 벌어진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사고였다. 이 일은 프랜시스가 11살이 되던 해에 터졌다. 그는 이날의 이야기를 하며 명확한 시점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정확히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벌어진 일이라고. 1982년 5월 14일 저녁 7시였다고 한다.


11살의 아이는 넓은 초원의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옆집은 사나운 개들을 이따금씩 풀어놓아 사고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목줄을 풀어놓은 옆집 개들이 담장을 비집고 들어와 말들을 공격하고 물어뜯은 것이다. 프랜시스는 말들을 보호하기 위해 며칠 동안 새총을 만들었다. 말들을 따라다니며 사납게 짖어대고 공격하려 하는 이웃의 개들을 향해 새총의 고무줄을 힘껏 당겼다. 그리고는 한쪽 손을 놓는 찰나, 돌이 자신의 왼쪽 눈으로 튕겨져 안구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렇게 왼쪽 눈이 망가졌다. 망막이 훼손된 것이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썼다고 한다. 눈이 너무나 아파왔다. 통증이 계속되었다. 아니, 아픔이 더욱더 강하게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