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애호가의 휴일
첫 월급의 전부는 아니고 반의 반 정도 되는 금액이지만, 오늘은 내가 첫 월급을 받은 날이다. 20살 되던 겨울, 파리바게뜨에서 주 5일 6시간씩 알바를 했었다. 그때 한 달에 80만 원 조금 넘는 금액을 받았던 것 같다. 그때 이후로..이야 7년 만에 큰 금액이 통장에 꽂히다니.
충분히 기념할 만한 날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그렇다고 커피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라떼보다는 에스프레소와 물맛으로만 승부하는 아메리카노를 훨씬 더 선호한다. 아메리카노는 중학교 때는 잠을 깨려고 억지로 처음 먹기 시작했다. 처음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중딩의 나는 '와 이게 어른의 맛이라면 나는 평생 애기 입맛 할래' 라고 다짐했다.
고등학교 때도 아메리카노에 대한 나의 인상은 비슷했다. 그냥 잠을 깨기 위한 용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쓴맛이 나는 음료. 그러다 n 수를 할 때에도 살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찾았다.
그러다 24살이 될 때쯤이었나. 사랑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아메리카노가 어느 순간 맛있어진 것이다. 카페에 가서 "너 뭐 마실 거야?" 하면 "난 아아"라고 대답하는 게 너무나 익숙해졌다. 어느 음식을 먹더라도, 아메리카노를 식후에 마셔주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특히 달다구리한 디저트와 아메리카노의 궁합은 비 오는 날의 재즈와도 같다.
2020년 9월에 이사를 갔을 때는 제일 먼저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을 사기도 했다. 22년 여름에 커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여행 갔을 때에도, 비엔나커피로 유명한 3대 카페 모두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기대에 비해 맛은 그저 그랬다. 역시 나는 순수 아메리카노 파인 듯하다.
커피의 맛을 사랑하게 되니 어찌 보면 카페에 가는 것을 즐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풀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카페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에서 우연히 분위기 좋고 조용한 카페를 발견하면 바로 다 구글맵 기본 폴더에 저장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카페에서 책 읽거나 글을 쓰는 게 가장 확실하고 즉각적인 행복이다. 참 가성비 좋은 행복이다. 카페를 고르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다. 맛 아니면 분위기. 보통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카페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은 아니고 8시 출근길 지하철에서 빈 의자 찾기 수준이다. 오늘 내가, 첫 월급을 기념하고자 찾은 카페는 맛과 분위기 다 잡은 카페다. 따듯한 우드 인테리어와 초록색 풀들, 그리고 커피에 진심이신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향긋한 커피..
드립 커피는 아메리카노보다 적게는 2,000원 많게는 8,000원까지도 더 나가기 때문에 잘 마시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나는 커피를 좋아할 뿐이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커피의 맛을 기가 막히게 구별해 내는 능력은 없다. 그런데 오늘은 첫 월급 받은 날이니까 드립 커피를 오랜만에 주문했다. 대여섯 가지의 드립 커피 원두를 보며 나는 직원분에게 "여기서 가장 고소한 산두가 뭐예요?"라고 말실수를 했다. 산두가 뭐냐 산두가 원두겠지. 평소에 먹지 않던 걸 어색하지 않게 주문하려다 보니 실수가 나버렸다. 뻘쭘했다. 그렇게 산두를 추천받고 향이 가장 좋은 과테말라 엘 소코로 버번 워시드(이름 어렵다)를 주문했다. "카드 앞에 넣어주세요"라고 점원분께서 말을 하시던 찰나, 이렇게 좋은 날 커피만 마시기는 억울했다. 황급히 메뉴판 디저트 코너를 훑고 복숭아 판나코타도 같이 시켰다. 내가 주문한 이름 어려운 산두(원두)에서는 기분 좋은 달콤한 향이 낫고 맛도 좋았다. 복숭아 판나코타는 그냥 요플레 복숭아 맛이랑 비슷했다. 정말 오랜만에 커피 다운 커피를 마셔서 너무 행복하다.
나는 내가 받은 월급의 3/4을 저축하겠다는 다짐과 목표를 세웠다. 그 이유는 토트넘 경기 직관하러 영국을 가고 싶기 때문이다. 근데 목표는 깨라고 존재하는 법. 1:1 필라테스 수업을 결제해버리면 내 목표는 수포로 돌아간다. 뭐 어쨌든 아낄 수 있으면 최대한 아끼고자, 회사 다니면서 커피를 사 마시지 않았다. 회사에 있는 커피 머신 기계가 우려 주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래서 자연스레 이렇게 긴 휴일에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말로 맛있는 커피 마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풍요롭고 풍족하다. 그래서 기록으로 꼭 남기고 싶었다. 오늘을 자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