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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음내림 Oct 27. 2017

우리는 모두 첫사랑 관음자였다.


쉬는 시간,

늘 같은 반으로 달려가 쓸데없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여자 애도 있고


옆 반 교탁 왼편 히터에 시간되면 달려와 자리잡고

은근히 삐딱하게 서서 옆 귀퉁이를 비워둔 채

교실 앞문만 응시하다 소란스레 뛰어 들어오는

한 친구를 보고 배시시 웃는 남자 애도 있다.


그 옆에 서서 수다쟁이를 토끼 눈으로

말똥 말똥 쳐다보는 남자 애도 있고

토끼 눈을 한 그 아이 옆에 곁눈질하며

앉아있는 조용하고 작은 여자애도 있다.


대각선 교실 뒷문쪽에 앉은 한 여자 애는

물끄러미 토끼 눈을 한 남자 애를 줄곧 응시하고

그 아이의 옆자리에는 쉬는 시간마다

찾아오는 곱슬머리의 교복을 잔뜩 줄인,

장난끼 많은 남자 아이가 짝꿍을 밀어내고 앉았다.


10분안에도 수많은 이해관계들과

묘한 긴장감이 교실 안팎을 둘러싸는데

정작 10분의 퍼포먼스 당사자들과

원인 제공자들은 일말의 관계 개선 의지도 없이

본인의 역할에만 몰두한다.


재잘재잘 떠드는 캐릭터는

다음 학기에도 삐약 삐약,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아이는 여전히 묵직하고,

토끼 눈의 남자 아이는 1분만 더 가까워지고

싶어하며, 대각선 저쪽의 여자 아이는 10분 동안

최선을 다해 애를 태운다.


누군가는 옆에 서려하고

누군가는 이미 자리를 선점했으며

누군가는 언제까지나 관찰자로 머무르고

누군가는 책상 아래로 손 끝만 잡아 뜯는다.


그 아이들은 10분이 지나면 각자의 반으로

돌아가는데 그 짧은 10분동안 여기 저기서 모여든

때아닌 관계의 혼란함들은 쉬는 시간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그 반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엎치락 뒤치락하며 각축전을 벌인다.


본인들만 빼고 모두들 관전하는

주인공이 4명 뿐인 연극의 끝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유명한 말이 의미를 잃을 만큼 마냥 낙천적이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이들 뿐인가하면,

또 그것은 아니다.


10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도 마찬가지로

전 10분동안의 무의식적 관찰 대상자들마냥

쫓고 쫓기는 구도가 새롭게 그려지기 때문인데,


수업 중 틀린 답을 내놓는 남자 아이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한 여자 아이.


샤프끝으로 손톱 끝을 후벼파는 부시시한 머리의

자유분방한 남자 아이를 넋이 나간 것처럼

바라보는 똑부러지는 인상의 모범생 여자 아이.


책상 밑으로 핸드폰 액정을 눌러대는 사나운 표정의 여자아이 뒷모습을 낭만에 빠져 바라보는

반에서 가장 조용한 남자 아이 등등...


이렇게 매일

아이들은 단 1분도 자신의 시선과

마음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순간부터

열심히 향하고 쫓기고 추격하는

사랑 관음자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때의 짝사랑이란 깎아지른 듯 아찔한 것이며,

첫사랑을 들키면 부러움을 사거나

혹은 칠칠치 못한 것이고,

마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 사고의 정부 입장 발표 못지않으며,


그들 나름의 연애 감정이란 쉼없이 서로의

가슴속을 충동질하는 티끌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열렬하고 때묻지않은 그들의

시선끝에 대롱대롱 위태로이 매달린

인생 처음의 풋사랑들이 서로를 관음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은근히 마음을

노출하기도 하고 차게 가둬두기도 하면서

우리들은 비겁하게 사랑을

관음하는 법부터 배운다.


본인 마음의 실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읽혀버리고 노출되어 폭로되는 그런 시간을 거쳐



우리는 첫사랑을 마냥 관음하는 시대를 지나

나서야 비로소 취향에 대해 솔직해질 수 있지만

여전히 미성숙한 열아홉, 열일곱의 두번째

어른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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