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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특별한 계획없이 걷다보면, 새로운 것들을 종종 마주하곤 합니다.

by 이영균

퇴사했습니다. 그날, 바로 비행기표를 끊고 제주도로 날아갔습니다. 12월 말, 서울에서는 숨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가 계속되었죠.


처음 제주로 나 홀로 여행. 혼자 돌아다니다 보니,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갈 필요 없이 오로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죠. 이번 여행은 ‘쉼’입니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서울로 돌아갈 계획 또한 세우지 않았죠. 비행기는 편도, 살면서 언제 이런 선택을 해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멋져 보였어요. '정말 네가 원하는 대로 즐기면서 사는구나!' 하면서 말이죠.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참 웃기죠. 아무렴 어때요. 내가 좋은데.


제주도 여행에 자동차가 없으면, 굉장히 불편합니다. 버스 간격은 30분 가까이 되고, 버스 노선이 대부분 제주의 외곽 부분을 다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번 여행에 렌터카는 필요하지 않아요. 돌아가는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고, 왠지 모를 의무감에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 같은 느낌이 싫어,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더라도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마음먹었거든요. 택시비가 얼마나 나올지, 손에 힘이 얼마나 들어갈지 중요하지도 않았죠. 그저, 나를 피로하게 만드는 '의무감'이 사라지기를 바랄 뿐.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바라보는 그런 여행, 저는 그런 여행을 원했어요.

우연히 조용한 곳을 찾다가 함덕해수욕장 근처, 한적한 시골스러운 분위기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제주스러운 골목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시골 정 많은 할머니 집 같은 분위기에서 제주 내음을 맡으며, 하루를 보냈어요. 매서운 바람에 온 몸이 얼어붙었지만, 저처럼 한적한 곳을 찾아온 게스트분들과 만나 거실에서 오순도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전혀 기대하거나 계획하지 않은 시간을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향유하며, 웃음 지었죠. 게스트 하우스, 매력적이더라고요.


게스트하우스의 묘미는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코로나로 여럿이 모여 파티하기엔 어려운 환경이지만, 이대로 조용하게 담소를 나누며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고, 특별합니다. 그동안 사람과의 대화가 목말랐던 걸까요? 각자 살아온 이야기나 고민거리 그리고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주제는 탱탱볼처럼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렇게 하루를 보냈어요.



"다음 날도 계획은 없어요."

퇴실하고 나와 걷다 보니,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며 바다를 보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연히 다음 숙소를 검색하다가 책을 보고 호스트가 정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서점 숙소'라는 곳을 찾았어요. 제가 딱 가고 싶었던 그런 공간이었죠. 계획했다면, 누군가의 리뷰를 미리 보고 상상을 했을 테고,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컸을지도 몰라요. '서점 숙소'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포근한 집 냄새가 지친 몸을 이끌고 찬바람에 맞서 이곳을 찾아온 용맹한 저를 따뜻한 온기로 감싸는 듯했습니다. 분위기와 냄새 그리고 인테리어까지 모두 경계심을 풀고 책을 읽기 좋은 포근한 느낌.



입실을 하고, 도미토리에 짐을 푸는데 어제부터 머무르고 있던 옆 침대 게스트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연박을 권유하시더라고요.


"신비한 공간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오름에게'라는 이 숙소만의 책을 보고 주제에 대한 감정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걱정도 고민도 많았지만, 이젠 괜찮아졌습니다. 더 이상 제주에 머무르는 시간이 의미 없어졌어요. 제 걱정거리는 모두 해소되었거든요. 그러니까, 꼭 연박하셔서 저처럼 좋은 영향받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진짜 첫 만남을 한 사람과 대화가 맞냐고 의심할지도 모르겠지만, 신실한 기도회에서 성령 충만하신 분을 마주친 기분이었죠. 그와의 첫 대화가 너무나도 성스러워 당황했지만, 그의 눈빛은 진심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기를 조용히 속으로 바랬죠. 겉으론 아닌 척하면서.



연박을 하기엔 이 숙소는 인기가 많았어요. '쉼'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리고 '독서'를 즐기는 이들이 찾는 성지라고 해야 할까? 사실, 입실하기 바로 전 지친 몸으로 또 이동하는 것이 꽤나 피곤했고, 다음 날 연박이 가능한지 확인했죠. 아쉽게도 연박은 불가능한 예약 상황. 포기하고 물어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호텔에서 근무하면서 깨달은 것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물어보지 않는 사람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혹시나, 취소된 예약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연박이 가능한지 호스트에게 물어봤죠.

그런데, 이게 웬일이죠. 딱 한 자리가 취소되고 비어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는 참 바보같이 "잠시만요, 씻으면서 생각해볼게요. 아마도? 제가 연박할 것 같아요."라고 두루뭉술한 답변을 남겼어요.


연박할 마음이 분명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바로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으니 막상 망설여졌거든요. 이번 여행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계획은 없지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여행인데, 혹여 누군가의 입김이 내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싫었던 탓일까? 아니, 아무래도 서울에 거주하던 자아가 나타나 '여기 한 번 더 머무르는 것이 맞을까? 이동해서 새로운 광경을 맞이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어떤 게 음식이 맛있을까? 하는 장금이의 마음으로 재봤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 잠시 멈칫했지만, 사실 이미 연박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찬바람에 꽁꽁 언 몸을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이면서 휘파람을 불고, 샤워실에 자욱하게 퍼진 안개에 뒤덮여 샤워를 즐겨야 마땅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왜냐하면, 이 망설임으로 인해 누군가가 그 사이 예약한다면, 나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울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빠르게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누구보다 빠르게 입금했어요.


그렇게 다음날도 이곳에서 머무르게 되었죠.



저녁 7시가 되자, '오름에게'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주제는 '사랑', 주어진 시간은 단 40분. 그동안 책을 읽고 마음에 닿는 구절이 있다면, 빈 종이에 받아 적어요. 우리는 이것을 '필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필사한 문장을 40분이 지나면, 호스트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글을 읽으며 선택한 문장과 공유한 이유에 대해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해요. 이틀을 머무르는 동안 저는 이 모임에 두 번 모두 참여했어요. 그만큼 좋았거든요.

'오름에게'를 진행했던 테이블 (주인장이 직접 제작한 테이블로 그의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첫날은 남자들의 가슴 아픈 그리고 뜨거운 사랑이야기. 두 번째 날은 환경, 제주, 반려견, 부모님 그리고 자신에 대한 사랑이야기. 처음엔 '사랑'이라고 하여, 1차원적으로 연인에 대한 사랑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더라고요. '나에 대한 사랑, 부모님에 대한 사랑, 애완동물에 대한 사랑, 환경에 대한 사랑..' 그들의 관점을 더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에 가뜩이나 작은 귀를 최대한 활짝 열었습니다. 제 인생에 최선을 다해 귀 기울였던 시간이 아녔을까 싶네요.


"제가 만약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연박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술을 한 방울 마시지 않았는데, 이미 잔뜩 취한 기분. 마치, 위스키 3잔을 샷으로 때려 넣은 것 같은 정도의 취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만큼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음에 감사했죠.



그리고 아직도 어느 게스트분의 사랑에 대한 철학이 기억에 남아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언가를 정말로 사랑하려면, 그 대상의 아픔까지 사랑할 줄 알아야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 띵.........."

이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돋았어요. 타자의 아픔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그들은 도대체 어느 가마에서 구워진 그릇이죠? 이토록 넓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그릇의 크기가 넓어진 계기는 무엇일까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제주가 좋아 제주에 대해 공부하고, 제주의 아픔까지 이해하며 같이 가슴 아파하는 그들 덕분에 제 그릇도 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깊어진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계획하지 않은 순간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선물을 넙죽 받아본 건 처음이에요. 우연한 순간, 광경, 만남, 대화. 계획은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기대하지 못한 감사함을 느낀 여행이었죠. 계획 없는 여행은 정말 매력적이네요. 분명, 즉흥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있어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값진 순간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계획을 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요. 근데, 생각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죠.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가득한 이 세상은 공들여 짠 우리의 계획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계획은 중요하죠. 계획이 없다면, 나아갈 방법조차 모를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오늘은 한 번 계획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계획한 것보다 더 멋진 하루를 보내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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