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읽고
p.8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p. 12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p.13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p.17 경멸은 대처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다. 경멸은 일종의 공격이므로, 공격에 대해 방위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경멸하는 상대를 똑같이 경멸하거나 그럴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무시함으로써 이겨낼 수 있다. ...... 연민은 공격이 아니고, 비유하자면 부드럽게 껴안는 포옹과 같아서, 일종의 베풂, 심지어 은혜라고까지 할 수 있으므로 방어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민은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어떻게, 무엇으로, 은혜에 대항한다 말인가. 대항한다 하더라도 은혜에 어떻게, 어떤 손상을 입힌단 말인가.
p. 29 전에는 아주 잘 아는 여자였으므로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었다. 지금은 아는 것이 없으므로 궁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녀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p.30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끌린다. 아는 사람은 편하지만 매혹의 대상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은 편하지 않지만, 때때로 매혹의 대상이 된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미 아는 상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p.35 다른 사람이 그의 내부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가 살도록 허락했다는 말이 아니다. 사건은 계약이 아니다. 허락이나 동의가 필요한 영역이 아니다. 마치 잠을 자는 동안 꿈을 꾸는 것과 같다. 꿈속에 누군가 등장하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다.
p.36 사랑은 덮친다. 덮치는 것이 사건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어떤 사람, 즉 사랑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 한다.
p.47 그가 떠올린 것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어떤 맛의 파스타가 아니라 그냥 기호로서의 파스타였다. 그리고 그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은 그녀였다. 파스타는 그녀를 지시하는 부호에 지나지 않았다.
p.67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사랑을 하며 살 수도 없는 이 난처함 사람은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안 하지도 못한다. 사랑을 하려고 하면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사랑을 하지 않을 때의 불안이 덮치기 때문이다.
p. 98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권력이 아니고 권력이 될 수 없고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강요받는 것이다. 강요하는 이는 없고 강요받는 이만 있다.
p. 129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끌어내어 진다. 수면 아래 깊이 잠겨 있거나 뒷방 구석의 어둠에 단단히 숨어 있던 것을 이끌어낸다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사랑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는 말을 어떤 소설가는 자기 소설집 작가의 말에 쓴 적이 있다.
p.146 제각기 다르게 사랑하면서도 누구나 '사랑한다'는 한 가지 표현을 쓴다.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말고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같은 말을 하면서 다르게 사랑한다.
p. 167 사랑 자체인 이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애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p.195 사랑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인데, 이름이 생기자 있는 것처럼 되었다. 사랑이라고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상관없는 어떤 것들이 사랑으로 호도되거나 미화되거나 전가되었다.
p.212 잘 보이기 위해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는 점에서 우정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가장 편하고 이상적인 관계이다. 보르헤슨는 사랑과는 달리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정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 말속에는 증명해야 할 불편한 의무가 사랑에는 주어져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p.247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형성된 세계인 그 사람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은 부당하고 비합리적이고 무엇보다 불가능하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의 세계인 연인의 과거는 당신의 출입이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한다.
p.285 중요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은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