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북리뷰

[사랑의 생애] 사랑의 숙주가 쓰는 사랑에 대한 단상

한국소설: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읽고

by 베티

한창 취업준비를 하던 20대 시절 형배와 같이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자격을 갖추면 사랑을 하겠다고 결심했고 감정을 컨트롤하려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연애에 대한 회의감도 생겼던 때였다. 주로 끝이 보이던 연애를 해왔던지라 이젠 영영 헤어지지 않을 이성과 만나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하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던가. 사랑의 시작도 끝도 사랑의 당사자인 나도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다. 작가는 이를 '사랑의 숙주'로 표현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다. 내가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내 안에서 사랑을 하는 것이라…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곱씹어 읽을수록 사랑을 바라보는 작가의 참신한 시각과, '사랑'이라는 미묘하고 추상적인 정체를 명료하게 풀어낸 문장들에 이끌리게 되었다. 그리고 고객을 끄덕이게 했다. 사랑은 덮치는 것이라면, 나는 지난 어린 시절, 굳이 마음의 문을 잠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끌린다는 표현은 알랭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엔 이 부분에 대해 공감은 하면서도, 반감이 생겼다. 그렇다면 서로 잘 아는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는 사랑이 아닌 정말 정으로만 함께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라고 구분하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진다. 사랑의 생애에선 '사랑이 덮치는 순간, 사랑의 숙주가 된 순간'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누군가를 너무 잘 알면, 결점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사랑에 빠지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다. 사랑에 빠진 이후, 사랑은 그다음의 생애를, 다른 모양으로 밟아 나간다.


앞으로 또 한 번 사랑의 숙주가 된다면 스스로 노력해보고 싶은 부분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이 앞선 연애의 가장 큰 이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개개인은 개별적이고, 특정한 상황 속에서 실존적으로 존재하는데 사랑의 모양도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런데 백가지의 사랑의 형태를 우리는 '사랑한다'는 한 가지 표현으로 퉁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왜 그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을까? 작가의 신선한 시각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또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제 비로소 내게 존재하게 된 사람임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상대의 이전 세계에 자유롭게 출입한다면 이성을 잃게 된 영석처럼 되어버릴지 모른다.


재미있고 신선한 사랑의 생애였지만, 인간의 의지에 따른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사랑의 영역은 표현되지 않아 아쉬웠다. 이는 작가가 인간을 사랑이 기생하는 숙주로만 풀어낸 한계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랑은 감정을 넘어 의지와 노력도 수반되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때론 매우 고통스럽고, 헌신해야 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들. 하지만 이렇게 정의 내리는 것도 무슨 소용인가 싶다. 작가의 말마따나 사랑은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 그렇기에 사랑은 늘 어려우면서도, 사랑이 기생하는 숙주의 삶을 또 한 번 기대하게 된다.




p.8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p. 12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p.13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p.17 경멸은 대처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다. 경멸은 일종의 공격이므로, 공격에 대해 방위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경멸하는 상대를 똑같이 경멸하거나 그럴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무시함으로써 이겨낼 수 있다. ...... 연민은 공격이 아니고, 비유하자면 부드럽게 껴안는 포옹과 같아서, 일종의 베풂, 심지어 은혜라고까지 할 수 있으므로 방어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민은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어떻게, 무엇으로, 은혜에 대항한다 말인가. 대항한다 하더라도 은혜에 어떻게, 어떤 손상을 입힌단 말인가.


p. 29 전에는 아주 잘 아는 여자였으므로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었다. 지금은 아는 것이 없으므로 궁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녀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p.30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끌린다. 아는 사람은 편하지만 매혹의 대상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은 편하지 않지만, 때때로 매혹의 대상이 된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미 아는 상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p.35 다른 사람이 그의 내부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가 살도록 허락했다는 말이 아니다. 사건은 계약이 아니다. 허락이나 동의가 필요한 영역이 아니다. 마치 잠을 자는 동안 꿈을 꾸는 것과 같다. 꿈속에 누군가 등장하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다.


p.36 사랑은 덮친다. 덮치는 것이 사건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어떤 사람, 즉 사랑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 한다.


p.47 그가 떠올린 것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어떤 맛의 파스타가 아니라 그냥 기호로서의 파스타였다. 그리고 그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은 그녀였다. 파스타는 그녀를 지시하는 부호에 지나지 않았다.


p.67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사랑을 하며 살 수도 없는 이 난처함 사람은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안 하지도 못한다. 사랑을 하려고 하면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사랑을 하지 않을 때의 불안이 덮치기 때문이다.


p. 98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권력이 아니고 권력이 될 수 없고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강요받는 것이다. 강요하는 이는 없고 강요받는 이만 있다.


p. 129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끌어내어 진다. 수면 아래 깊이 잠겨 있거나 뒷방 구석의 어둠에 단단히 숨어 있던 것을 이끌어낸다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사랑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는 말을 어떤 소설가는 자기 소설집 작가의 말에 쓴 적이 있다.


p.146 제각기 다르게 사랑하면서도 누구나 '사랑한다'는 한 가지 표현을 쓴다.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말고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같은 말을 하면서 다르게 사랑한다.


p. 167 사랑 자체인 이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애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p.195 사랑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인데, 이름이 생기자 있는 것처럼 되었다. 사랑이라고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상관없는 어떤 것들이 사랑으로 호도되거나 미화되거나 전가되었다.


p.212 잘 보이기 위해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는 점에서 우정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가장 편하고 이상적인 관계이다. 보르헤슨는 사랑과는 달리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정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 말속에는 증명해야 할 불편한 의무가 사랑에는 주어져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p.247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형성된 세계인 그 사람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은 부당하고 비합리적이고 무엇보다 불가능하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의 세계인 연인의 과거는 당신의 출입이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한다.


p.285 중요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은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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