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소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책을 읽다 가장 충격받았던 문장이었다. 헐, 그림을 그리고 싶어 떠난 거였어?? 아니. 직장을 그만두고, 심지어 아내와 자식들까지 버리고 떠난 이유가 꿈을 좇기 위해서였다니. 이런 상황에서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시나리오, 예를 들어 그가 바람을 피웠더라면 차라리 이해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꿈을 좇기 위해 가족을 버린다니? 심지어 스트릭랜드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 '6펜스의 세계'에 있는 많은 이들은 그에게 '인격'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인격이 없었다? 다른 길의 삶에서 더욱 강렬한 의미를 발견하고, 반 시간의 숙고 끝에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동댕이치자면 아무래도 적지 않은 인격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갑작스러운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더욱 큰 인격이 필요할 것이다."
2차 충격을 준 문장. 어쩌면 '달의 세계'에서의 인격은 달리 정의될 수 있을지 모른다. 꿈과 이상을 좇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뛰어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그러한 세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말의 인간성을 찾기 힘든 그가 야속하다가도 "부. 러. 웠. 다" 잠깐의 생을 사는 동안 그는 꿈을 위해 모든 걸 던져보았기 때문이다. 꿈 이외의 것은 그에게 모두 겉치레일 뿐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나만의 '달'을 잃지 않고, '달'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20대 땐 나의 '달'을 좇아보기도 했지만 사실 그땐 가난한 대학생이요. 용기를 내어 버릴 만한 '6펜스'가 딱히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미 안정적인 삶에 익숙해져 '6펜스'를 지키기에 급급할 때가 많다. 또한 내가 꿈꾸는 '달'이 아직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겠다. 흐릿하게만 보인다. 스트릭랜드처럼 마흔 즈음이 되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나의 '달'을 찾는다면 그때의 나는 한걸음 나아갈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오랜 기간 잊고 있었던 달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타히티에 가고 싶은 그런 날이다.
p.29 내가 스트릭랜드 부인을 좋아했던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녀는 주변을 늘 우아하게 꾸밀 줄 알았다. 그녀의 집은 언제 봐도 깔끔하고 상쾌했으며, 병에 꽂힌 꽃은 늘 명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응접실의 사라사 커튼은 디자인은 간소했으나 밝고 아름다웠다. 예술적인 정취가 있는 그 조그만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기분이 좋았고, 식탁도 훌륭해 보였다. 하녀가 둘 있었는데 모두 단정하고 예뻤으며, 음식 솜씨도 좋았다. 누구라도 스트릭랜드 부인이 훌륭한 주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p.55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구설수가 무서워서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p.56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훌륭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p.85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 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p.196 얄미운 말이기는 했지만 전혀 틀린 말도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또 하나의 결점은 아무리 돼먹지 않은 인간이라도 말로 맞수가 될 만한 사람과는 어울리기 좋아한다는 점이다.
p.201 여자는 말이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
p.207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중략)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 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p. 212 스트릭랜드에게는 색채와 형태들이 어떤 특유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가 느낀 어떤 것을 전달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고, 오직 그것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그림들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찾는 미지의 그것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대상을 단순화하고 뒤틀었다. 사실이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와는 관계없는 무수한 사실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만을 찾았다.
p.219 그의 진짜 생활은 꿈과 잠시도 쉬지 않는 그림 작업, 이 두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p.220 고요히 천상을 떠돌고 있었던 그의 상념이, 마치 꽃 사이를 날던 오색영롱한 나비가 문득 얼마 전에 의기양양하게 벗어버렸던 자신의 추잡한 유충 껍데기를 발견하고는 몸서리를 치듯이, 여자를 보고 몸서리를 치는 것이었다. 나는 예술이란 성적 본능이 구현된 것이라고 본다.
p.227 날은 뜨겁고 색채는 현기증을 일으킨다.
p.245 대개의 사람들이 틀에 박힌 생활의 궤도에 편안하게 정착하는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던 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p. 253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p.259 인격이 없었다? 다른 길의 삶에서 더욱 강렬한 의미를 발견하고, 반 시간의 숙고 끝에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동댕이치자면 아무래도 적지 않은 인격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갑작스러운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더욱 큰 인격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렉 카마이클은 생각에 잠기며 말을 이었다.
p.275 그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둥근 구멍에 모난 못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별의별 구멍이 다 있어, 제 구멍을 찾지 못하는 못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