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안진진에 몰입되어 소설을 읽어나갔다. 매번 불행과 싸워 나가며 치열하게 일하는 안진진의 어머니를 보며,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안진진의 어머니처럼 지독한 가난과 싸우기 위해 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워킹맘으로 치열히 일해 온 엄마가 오버랩될 수밖에 없었다. 학창 시절 행사가 있을 때마다 바쁜 엄마는 늘 참석하지 못했고, 나도 늘 집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진진의 이모처럼 말이다. 이전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많이 편찮게 되셨는데, 외가댁과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회사생활을 하면서 병간호까지 거의 도맡아 하는 엄마를 보며 가끔 이 상황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안 그래도 늘 일하느라 바쁜 엄마의 삶이, 더 바쁘고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안진진의 어머니의 삶이 해결해야 할 일로 끊임없이 바쁜 것처럼.
속상하긴 하지만 어쩌면 개개인에게는 모두 저마다 풀어야 할 삶의 과제들이 있고, 그 과제들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음을 책을 통해 느꼈다. 그리고 무언가 위로(?)가 되었다. 너무나도 여유롭고 풍요로워 보이는 안진진의 이모의 선택은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봐도 불행할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진진의 이모에겐 '삶의 단조로움'과 '지루함'이, 안진진의 엄마에게의 '가난' 만큼이나 무겁고, 풀어야 할 삶의 과제였을 것이다.
아직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당시 이해되지 않았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이해가 될 때가 있다. 너무 힘들고, 벗어나고 싶고, 모순 투성이인 것도 시간의 약을 먹게 되면 어느 순간 이해가 되는 순간이 온다. 예전에는 내 삶에 모순들이 펼쳐지면 엄청 호들갑을 떨었었던 것 같다. 이젠 그런 상황이 오면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기보단 담담히 나아갈 수 있는 맷집을 키워보고 싶다. 책 표지에 있었던 문구처럼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기에.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내 앞의 모순들도 어쩌면 지나고 보면 일란성쌍둥이처럼 모순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p.13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p.15 이십 대의 젊음에게는 온갖 것이 다 사랑의 묘약일 수 있다. 이십 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p.19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다 거두어 버렸다. 이런 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을 내가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이것이 사춘기의 내가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p.20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p.25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새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p. 31 거기에서는 비록 전쟁터 같긴 했어도 지루하지는 않았다. 하긴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쉭쉭 나는 전쟁터에서는 누구라도, 결코, 지루할 수 없는 법이다.
p.101 나영규의 활짝 웃음이 옆 사람까지도 웃게 만드는 전염성 강한 것이라면 김자우의 수채화 웃음은 여운이 길어 웃음이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웃음이다.
p.116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p.121 가족 중 누구 하나의 불행이 너무 깊어 버리면 어떤 행복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법이다.
p.129 비유하자면 이모부는 결혼 새 거 지금까지 삼십 년이 가깝도록 단 한 번의 결행이나 연착 없이 정시에 도착하고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 같은 사람이었다.
p.130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나 또한 내 어머니처럼 이종 사촌들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도저히 대범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와 달랐던 점은 이종 사촌들에 대한 질투심을 감쪽같이 잘 숨기겨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p.139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p.147 내가 참지 못했던 것은 키스가 아니었다. 그때 이후 시시때때로 눈앞에서 나부끼는 나영규의 인생 계획서, 그것이 문제였다.
p.151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p.171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히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p. 177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서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유혹이 담겨 있다.
p.187 내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 행방불명인 아버지가 내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나는 더욱더 김장우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를 안고 있는 김자우의 팔에도 더욱 힘이 가해졌다.
p.209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 준 주리였다.
p.213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원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p.229 나영규 같은 꼼꼼한 인생계획표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한 것일 수도 있었다. 즉시즉시 수정하고, 수정하다 안 되면 또 바꾸고, 그래도 안 되면, 그래도 안 되면.....
p.272-273
인간에게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살마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는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