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북리뷰

[호밀밭의 파수꾼] 우리에게도 피비가 있다면

영미소설: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by 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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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이 경멸하던 어른들의 시선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이 어린아이는 왜 이렇게 부정적인 것인가', '왜 이렇게 방황을 하는 것인가' 결정적인 것은 오두막을 지으며 살겠다고 했을 때다. 가족을 떠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두막을 지으며 살겠다고 했을 땐 부모의 심정이 상상되어 괴로웠다. 이미 나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책을 곱씹어보니 내 안에 잊혀 있던 홀든과, 규율에 갇힌 잠깐의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이 생각났다. 기숙사의 종류는 성적에 따라 A, B동으로 나뉘어 있었고, 기숙사 내의 방 배치도 성적순으로 묶어놨음을 우린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기숙사 생활은 철저히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B동에 살던 몇몇의 친구들이 밤늦게 기숙사를 탈출하고자, 조금 높은 층에서 뛰어내렸다가 허리를 다쳤던 기억이 난다. 다친 건 유감이지만 그 당시 나는 그들이 용감하다 생각했다. 나도 기숙사 생활을 오래 하진 못하고 통학으로 바꾸었다. 나름 나만의 반항(?)이었던 셈이다.


학교 내에서의 한 사건도 문득 생각이 난다. 돌아보면 홀든이 경멸하던 선생님들보다 더 심했던 것 같다. 전교 1등을 눈에 띄게 편애하던 한 선생님이었는데, 성적도 좋지 않고 말썽만 피우는 친구의 뺨을 때리고 발로 찬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를 지켜봤던 친구들도 당황스럽고 매우 화가 났는데, 돌이켜보면 그때 그 친구의 심정은 어땠을지 감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홀든은 학교에서 나와, 호텔에 들어선 후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다. 세상엔 더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바깥세상에선 오히려 홀든이 정상(?)이었던 것이다. 당시 격하게 뺨을 맞았던 친구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사회에선 오히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지 모른다.


홀든은 결국 단 한 사람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고,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해주는 한 사람 말이다. 그가 피비었다. 피비는 홀든이 어떤 말을 하든 들어주고, 홀든이 떠난다고 했을 때 같이 떠나겠다고 했다. 홀든을 향한 믿음을 보여주었던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홀든은 피비로 인해 이상한 사람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오두막으로 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세상의 방황하는 모든 홀든에게(어린이든 어른이든) 피비 같은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방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파수꾼 말이다.




p.20 어른들은 자신들의 말이 늘 맞다고 생각하니까. 난 그런 일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어른들이 내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지겹기까지 하다. 때로는 나도 나이보다 조숙하게 행동할 때도 있다. 그건 정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른들은 절대로 아무것도 모르니까.


p.32 정말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지난여름에 읽었던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와 같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면, 상당히 좋은 책임에는 분명 하나, 몸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다. 어째서 몸이 전화를 걸고 싶지 않은 사람에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차라리 토머스 하디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난 '유스티셔'를 좋아하니까.


p.88 문제가 있다면, 이런 일들은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마력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얼굴에 물을 내뿜고 있는 여자 같은 경우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생겼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p.137 난 목사들에 대해서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다. 내가 다녔던 학교마다 목사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틀에 박힌 거룩한 목소리를 만들어 설교를 하곤 하는 것이다. 난 그게 싫었다. 왜 좀 더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인지 이애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목사들의 이야기가 순 거짓말처럼 들리는데도 말이다.


p.164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 나이를 더 먹는다거나 그래서는 아니다. 정확하게 그건 아니다. 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


p.167 좀 웃기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 애를 본 순간 불현듯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미친 게 분명했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그 애를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다니. 정말 미쳤다. 나도 인정한다.


p. 207 사람들은 저렇게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서 라디오를 틀고는, 좋은 곳으로 저녁식사를 하러들 갈 것이었다. 앨리를 저렇게 내버려 두고. 그 사실이 나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무덤 속에 있는 건 동생의 껍데기일 뿐이고, 영혼은 천국인지 어딘지에 있다느니 하는 허튼소리는 나도 잘 알고 있다.


p.229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p.247-248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갈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는 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p.248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p.249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가고 싶은 길을 찾고 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학교에 들어가는 일이어야 할 거야. 그러지 않으면 안 돼. 넌 학생이니까. 네 마음에는 안 드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넌 지식을 사랑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일단 그 바인즈 선생의 구두 표현 과목의 학정은 따고......'


p.278 피빅 ㅏ목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며, 불현듯 난 행복함을 느꼈으므로. 너무 행복해서 큰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p.279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 테면, 시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리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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