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북리뷰

[런던 스케치] 스케치라 하기엔 결코 가볍지 않은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를 읽고

by 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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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홀로 떠난 첫 배낭여행지는 런던이었다. 당시 교환학생으로 핀란드에 머물고 있었고, 저가 항공으로 가장 저렴하게 떠날 수 있었던 곳이 런던이었다. 작고 비좁은 비행기에 몸을 실은 어린 대학생의 마음엔 설렘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렇게 마주한 런던은 참 화려했다. 그리고 웅장했다. 여행자의 눈엔 세련된 런던만 가득 담았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긴 세월을 건너왔다.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한 곳이라도 그곳엔 비슷한 인생이 있음을 이젠 경험으로 안다. 도리스 레싱은 런던에서 피고 지는 우리네의 인생을 담담하게 담았다. 일부러 행복하게 꾸미지 않는다. 그렇다고 좌절을 노래하지 않는다. 런던에도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줄리는 런던의 한 후미진 곳에서 아이를 낳는다. 부모님은 이 사실을 모른다. 장애를 가진 딸을 둔 어머니는 딸이 정상이라 생각한다. 특수학교 입학을 거부한다. 평화로운 공원에서 잠시나마 부분적 자유를 맛본 개들은 부르짖는다. 곧 주인들이 부르면 태곳적의 야생미를 버리고 다시 질서를 찾아 돌아간다.


부부라는 관계는 참 쉽지 않다. 이혼 후 시간이 흘렀음에도 자녀 등의 문제로 무 자르듯 끈을 자를 수가 없다.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엄마를 이해하는 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서로를 불편해하지만 늘 서로를 걱정하고 있다. 딸은 그렇게 엄마에게 손을 내민다. 이방인이 많이 없었던 옛날의 평화로운 런던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 젊은이는 내심 이를 불편해한다.


빅벤 속 시계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고, 우리네의 인생은 지속되고 있다. 화려한 도시 속에서 크고 작은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이들, 이방인으로서 고군분투하는 이들. 런던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수묵화 같다. 런던 스케치의 ‘런던’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곳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데비와 줄리

p.35 줄리의 눈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그러다가 눈물이 고인 것을 알고는 얼른 어머니를, 그리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흐느끼며 그들에게 안겨 위로받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그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으며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텔레비전을 켜놓았다. 이제 세 사람은 모두 화면을 응시하며 앉아 있다.


p.43 줄리는 두 팔로 팬더 곰을 안고 생각했다. 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장애아의 어머니

p.62 스티븐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자신이 그 방에서 보았던 장면을 계속 되새겼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대할 때 칸 부인의 얼굴에 나타났던 부드러움, 소년의 얼굴에 어린 미소, 여동생을 향한 진실하고 따뜻하고 애정 어린 미소, 그 작은 소녀는 그들의 부드러움 속에 폭 싸여 있었다. 가족들이 그 애를 극진히 위하고 사랑하는데 그 여자애는 가족에게 얻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을 특수학교에서 배울 것인가?


공원의 즐거움

p.71

울타리 안에는 야생 동물이 있다. 울타리 밖 자유로운 쪽으로는 인간과 개들이 있다. 사슴들은 개가 울타리에 와서 코를 비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가 없는 곳에서 개들을 본다.

개들은 철조망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 그들은 여기저기 코를 비비며 자신들과 그 짐승들의 관계 - 그 짐승들의 냄새는 태곳적의 기억들을 불러일으킨다-가 정말로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여기 주인들이 온다. 여기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질서를 세우려고 달려온다. “빨리 이리와, 본보! 그러프! 피파! 룰루! …… 나쁜 녀석! 빨리 와!” 집단은 무너지고 개들은 차분하게 주인에게 돌아간다.


자궁 병동

p.85

“당신은 얼마나 운이 좋은 여자요. 안 그래요? 언제나 톰이 있었으니. 확신하건대 우리 모두는 우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라요”


미스 쿡에게는 아이가 없고 그녀가 결혼한 적이 없이 혼자 살았다는 것을, 그녀에게는 고양이 외에는 만지고 토닥거리고 안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른 여자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지하철을 변호하며

p.118 이 여자는 런던의 ‘총명한 젊은이 세대’에 속하던 사람이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이십 년대였다. 말할 때 그녀는 정답게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이지만 실은 외롭다. 그녀는 내가 또는 누구도 자기 말에 동조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는다면 낙원 같은 섬에서 살았던 것이 무슨 소용인가?


p. 120 흑인 청년 하나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꿈꾸며 앉아 있다. 그의 두 발은 자기만의 리듬에 맞추어 부드럽게 박자를 맞춘다. 그는 이 열차 안의 사람들 중에서 제일 비싸고 세련된 옷을 입고 있다.


p.131 내가 박물관 밖으로 나오면 하늘은 여전히 빛나겠지만 늦은 오후의 어두운 빛을 띠고 있을 것이다. 카페를 찾아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 그다음은…… 한두 시간 안에 극장의 커튼이 올라가거나 영국 국립 오페라가 시작될 것이다. 이 모든 시간이 지난 뒤에도 몇십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극장의 커튼이 올라가면서 조명이 어두워지는 순간만큼 감동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새 카페

p.138 멜로드라마란 우리에게 익숙한 일련의 감정적인 사건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는, 그와 비슷한 일들을 본 적이 있다 해도 그것을 진부하지 않고 오히려 놀랄 만큼 개별적인 것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열쇠를 우리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p.144 넋이 나간 듯한 남자의 얼굴 위로 빠르게 감정들이 지나갔다. 후회도 있었다. 그러나 자의식에 찬, 폼으로 하는 듯한 그런 후회였다. 그는 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자의식이라는 생명선을 놓지 않을 것이었다. 당혹함도 있었고 상실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감정들을 떨어내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로맨스 1988

p.152 그의 얼굴에는 질서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표정이 떠 올라 있었다.


진실의 대가

p.154 인생, 그건 신의 작은 대본이지


장미밭에서

p.175 여자는 늘 그래 왔듯이 딸하고 있게 되니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셜리의 반응은 알 도리가 없었다. 무례할 수도, 격정적일 수도, 무뚝뚝할 수도, 유쾌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예측할 수 없었다. 마이러는 삶의 절반 동안 셜리가 마치 지뢰밭인 듯이, 그리고 자신은 그곳을 가로질러 달리는 듯이 행동해 왔다고 느꼈다.


폭풍우

p.183 이제 나는 내가 런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도록 만들고 싶은 우스꽝스러운 욕구에서였다. 런던은 마치 위대한 극장 같다. 당신은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응시할 수도 있다. 나는 때때로 그렇게 했다. 당신은 카페나 벤치에 몇 시간이고 앉아 바라볼 수도 있다. 언제나 놀랄만한 또는 재미있는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공원들, 리젠트 공원, 햄스테드 히스. 당신은 절대 싫증 나지 않을 거다


흙구덩이

p.198 여자는 이 기쁨의 특질을, 그것의 정확한 무게와 질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p.201 여자는 이제 자신은 버림받아 연약해졌던 그 여자가 아니라 그를 만나기 이전 처녀로서의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연약함으로부터 해방되기란 쉽지 않았다.

p.203 잘생긴 그의 얼굴은 마르고 주름 투성이었다. 그녀 자신이 말라서 가벼워 보이듯 그 또한 메말라 버린 듯했다. 시간이 태양처럼 그녀에게서 수분을 빨아내고 있었다.

p.201 새처럼 자유롭게 출발하리라…… 아니, 그 말은 틀렸다. 새들은 인간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조직과 힘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의 속성을 보건대 인간은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의 짧고 소중한 시간 동안만 자유로운지 모른다. 자유롭게 걷고 멈추고 친구들을 사귀고 방황하고 생각을 바꾸고 원한다면 하루 종일 산기슭에 앉아 구름을 바라보고……

p.224 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미지의 것을 가지고 온다. 인류의 먼 과거에 뿌리를 두고 미래를 향해 뻗어 있는 가능성과 기회들을 가지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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