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지구가 드디어 돌아버렸나 봐
TO. Mommy.
엄마, 지구가 드디어 돌아버렸나 봐. 장마가 사라졌대. 믿을 수 있겠어? 여름인데 비가 안 와. 나 작년 6월에 큰 맘 먹고 4만 원이나 하는 파도 무늬 장우산을 샀는데 쓸 일이 없어. 비가 애매하게 오는 날엔 고민하다 단우산을 집어들거든. 제주도랑 강원도는 지금 가뭄으로 난리도 아니래. 웃긴 건 가뭄을 검색하면 '가뭄 관련주'가 제일 먼저 나온다? 나도 전에 미국이 100년만의 한파다 뭐다 했을 때 관련주로 재미 좀 봤거든. 그때 생각이 나서 좀 웃기더라고. 그저께 텍사스엔 홍수가 나서 80명이 떠내려갔대. 뉴스에선 100년에 한 번 올 재앙이라고 하더라. 미국 홍수 수혜주도 있을까? 찾아봤는데 있더라고. 수해로 수혜를 보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는 거야.
지난주엔 제습기를 처음으로 틀었는데 87이라는 숫자가 빨갛게 깜빡거렸어. 폭염이라면서 그렇게 눅눅해도 되는 거야? 폭염은 불꽃이 죽일 듯이 내려친다는 뜻 아니었어? 그럼 바싹 타들어가야지. 나는 고온다습이란 말도 잘 이해가 안 가. 아 엄마한테 따지려는 건 아니고, 그냥 짱나서 그래. 한 달 동안 제습기에 쌓이는 물만 모아도 연못 하나는 거뜬히 차릴 수 있을 것 같아. 공기 속에 그렇게나 많은 물이 숨어들어 있다는 게 신기한 거 있지.
오늘은 샴푸랑 바디워시를 새로 샀어. 이름은 쿨 솔트 스케일링 샴푸. 써봤는데 딱히 쿨하지도 않고 솔트는 대체 뭔지 모르겠어. 샴푸에 소금이 들어가기도 하나? 바디워시는 라임 앤 만다린이라 쓰여있는 걸 집었어. 이름이 참 긴데 아브카 퓨어 앤 마일드 바디워시 라임 앤 만다린이더라고. 이거 보니까 전에 우리 구로 살 때 아파트, 에스클래스 베르데 카운티 시그니처였나? 그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생각나는 거 있지. 거긴 그래도 여름에 꽤 시원했는데. 벌레도 안 나왔고. 지금 나 사는 아파트엔 벌레가 너무 나와서 미칠 것 같아. 1층이라 더 그런가봐. 그 많은 벌레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기어들어 오는 걸까?
꿀벌도, 매미도 떠났는데 장마까지 가버렸다는 게 나는 좀 슬프다? 누가 지구만한 드릴로 하늘을 시원하게 뚫어줬으면 좋겠어. 세상이 잠길 정도로 미친 듯 쏟아져 내려도 괜찮을 것 같아. 엄마도 비 오는 날을 좋아했잖아. 지금은 세상이 폭싹 말라버린 것 같아.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계속해서 허우적거려. 다들 어디에 그렇게들 빠지는 걸까? 대기층에서 투명 폭포가 쏟아지나? 지구가 보이지 않는 바다 속으로 서서히 빠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해. 올 여름은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어. 거긴 좀 괜찮아? 뭐가 됐든 잘 흘려보내기를 바랄게. 겨울이 오기 전엔 답장해줘!
With love, Sweet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