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래간만에 꿈을 꿨습니다.
물론 다른 날도 잠을 자고 꿈을 꾸었겠지만 눈을 뜨면 지워지는 희미한 장면들이었습니다.
어젯밤은 근 몇 달 중 가장 강력하고 희한한 꿈이었지요.
꿈에서 저는 부산에 갔습니다.
친구 혹은 지인들과 함께였는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아요.
여행을 갔던 건지, 답사를 갔는지 낡고 허름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파트의 갈라진 외벽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외벽은 새하얀 바탕에 파스텔 톤 핑크색이 덧칠해져서 그 자체로 기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쓰러져가는 건물의 내부를 가리려는 심산으로 껍데기의 명도를 밝힌 것만 같아 눈썹이 찡그려지더군요.
옆에 있던 누군가가 이 아파트 단지가 오징어게임의 세트장으로 쓰인 곳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단지 입구 정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아파트 한 채의 옥상을 바라보며
저기가 어느 배우가 오징어게임 안에서 좋아했던 그곳이야,
라고 설명을 해주더군요.
저는 그렇구나, 하고 들었죠.
그러다 갑자기 훽 하고 장면이 바뀝니다.
한강이 낸 책 중에서 <빛과 실>이라는 에세이가 있습니다.
꿈에서가 아니라 실제로요. 저는 읽어본 적은 없고 이름만 들어봤던 책인데, 꿈에서는 <빛과 실>이 에세이가 아닌 소설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와 친한 동생 K가 나타납니다. 그 한강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가 있대요. 꿈속의 저는 그 드라마를 보지 않은 상태였고 K는 결말까지 관람을 마친 상황이었습니다.
평소 말괄량이 같은 K가 예술 작품의 큐레이터가 되어 드라마 내용을 설명하고, 의미를 해설해주었지요.
K에 따르면 <빛과 실>은 굉장히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의 제목이었습니다.
여름날의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널따란 그림자를 상상해볼까요.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그늘이라는 건 완전한 어둠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첫째로 빛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생겨나며, 둘째로 그늘은 되려 따가운 볕의 열기를 막아주는 차양막으로서 존재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빛이 없다는 것과 빛을 막아준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부드러운 응달이 바닥에 펼쳐져 있었는데, 양지와 음지의 경계를 가르는 선이 분명해서 마치 누가 보따리에서 일정 부피만큼의 그늘을 꺼내 풀어놓은 것만 같았죠. 그런데 그 위로 아주 아주 밝은 빛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하얀 광선이었어요, 실의 여러 가닥처럼 가늘게 쪼개져서, 촘촘한 그물망의 무늬로 살포시 어둠을 덮었습니다. 조밀하고 날카로운 빛의 실그물이요. 다만 전체를 뒤덮지는 못해서 그물코의 네모난 격자 부분은 여전히 그늘진 음영이었지요.
꿈 안에서는 즉각적으로 이미지가 그려졌는데 말로 풀어 설명하려니 쉽지가 않네요.
제 판단을 덧붙이긴 싫지만 빛이 꼭 방해 공작을 펼치는 것만 같았어요. 오래된 아파트를 핑크색의 페인트로 뒤덮는 일처럼 말입니다. 그런데요, 그늘 위로 빛이 씌어진 그 그물망이요, 양말 뒤집히듯 속과 겉이 뒤집혔습니다. 원래의 망은 빛이 어둠을 끌어당기는 진부한 이야기였다면, 뒤집힌 후에는 어둠이 빛을 끌어안는 독특한 모양새로 바뀐 것이지요.
K가 빛과 어둠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쏟아내주었고, 저는 무언가 아! 하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한스럽지만 그게 정확히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꿈에서 깨고 보니 모든 문장이 흩어져 사라진 뒤였어요. 붙잡아보려고 얼른 머리를 쥐어짜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대사 없는 장면만이 남은 겁니다.
다시 꿈속의 K는 <빛과 실>의 결말을 차분하게 얘기해주었어요. 그 드라마의 끝에서는 주인공이 아파트 옥상에서 스스로 떨어지게 된다는데, 그 이유를 듣고 꿈속에서도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공은 평생을 좋은 환경에서 큰 고통이나 불행 없이 살아온 인물이었대요. 그래서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늘 죄책감을 느꼈다고 하더군요. 결국에는 그 죄책감이 순백을 잡아먹을 만큼 커지고 커져서, 자신의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죠.
그 이야기를 듣고—저는 한강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음에도—아 참 한강 작가다운 이야기네,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곤 그 찝찝한 아파트의 옥상을 정확하게 올려다 본 다음 무언가를 곱씹다가 잠에서 깨어났지요.
이 정도로 의미심장한 꿈 속에 들어갔다 나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다만 저는 왜 이런 꿈이 제게 찾아왔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제가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보고서 무엇도 해줄 수 없음에 무력감을 느끼는 부류의 인간이라 그렇습니다. 요즘 들어 그런 종류의 부채 의식을 자주 느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는 저의 고통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습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덤덤하게 흘려보내고 받아들이는 쪽에 가깝지요. 혹자는 아직 압도될 만큼의 어둠에 매몰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어느 쪽의 경우이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더군요.
어렸을 때 기대한 세상과 크고 나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차라리 아예 일찍부터 알았거나 영영 모른 채로 살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너무 무겁게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걸 알지만서도, 그럼 나만 편하면 되는 건가 하는 질문 앞에 다시 가로막히게 됩니다.
서술했듯, 요즈음 응달이 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 저도 모르는 새에 그늘을 낮잡아 보는 시선을 가지게 될까 두렵기도 하지요. 불쌍하게 여기는 위선은 거두자고 다짐해보지만 그럼에도 세상에는 가엾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더군요. 가엾은 마음을 품고, 아무런 행동도 내놓지 못한 채로, 빛이 내리쬐는 밖으로 고개를 다시 돌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모호하고도 모순적인 태도이지요.
꿈에서의 죽음은 종말이 아닌 전환과 변화를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고로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시는지를, 어떤 자세와 시선으로 세상의 명과 암을 바라보고 계신지를 여쭙고 싶었습니다. 진심으로요. 선생님은 얼마나의 정직한 다정함을 품고 살아가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