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킷 10 댓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응밍 Apr 22. 2020

'앎'을 향한 질주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델마와 루이스>는 델마와 루이스의 여행기로 시작해 탈주(脫走)기로 끝난다. 영화는 가정주부 델마와 웨이트리스 루이스가 주말에 여행을 떠나며 시작한다. 두 사람은 길을 가다 잠시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바에 들른다. 고압적인 남편을 둔 델마는 처음으로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나온 여행에 들떠있다. 여행길이 걱정인 루이스와 다르게, 델마는 바에서 할랜이라는 남자와 춤추며 즐긴다. 하지만 할랜은 델마를 강간하려 하고, 루이스는 이를 발견한다. 루이스는 할랜을 저지하기 위해 총을 겨눈다. 할랜은 물러나지만, 루이스와 델마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던진다. 루이스는 이에 격분해 본능적으로 총을 쏘게 되고, 그 자리에서 할랜은 즉사한다.

이제 델마와 루이스는 도망자다. 델마가 ‘연쇄살인범이나 산짐승을 만나면 쓸려고’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가져온 총은 살인 도구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둘은 무작정 차를 타고 도주한다. 이들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도로를 달리며 여러 남자들을 만난다. 이 과정에서 일은 점점 커지고, 델마와 루이스 또한 점점 더 대담한 범법자가 되어 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델마와 루이스를 억압하는 인물들로 등장하며,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범법자가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등장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주인공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선 자신이 생계를 책임진다는 이유로 델마에게 큰소리치는 대릴은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편이다. 델마를 강간하려다 루이스에게 살해당하는 할랜 또한 술 한 잔의 값이면 여성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도로에서 마주친 트럭 운전사는 여성을 비하하며 델마와 루이스를 희롱한다. 지미는 루이스를 적극적으로 돕는 좋은 연인이지만, 루이스가 상황에 대해 설명하지 않자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델마와 루이스를 이해하는 형사 할은, 그들을 돕고자 하지만 결국 어떤 일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다. 매력적인 제이디는 델마에게 새로운 경험과 쾌감을 전해주지만, 델마와 루이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거액의 돈을 훔쳐 달아난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 델마와 루이스는 새로운 세계로 탈주한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점포를 털고, 자신들을 희롱하던 운전수의 트럭을 불태우며, 고속도로에서 만난 경찰관을 트렁크에 감금하기도 한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로 위를 질주하는 이들의 행보와, 카메라에 담기는 거대한 자연은 그 무엇보다 강한 카타르시스와 해방감을 선사한다. 뒤돌아볼 여지도 없이 도망가는 신세지만, 델마와 루이스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다. 델마와 루이스는 남성중심적인 구조 속에서, 그 권위에 저항하며 균열을 낸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우리가 도울 수 있게, 멈춰라’라고 말하는 공권력의 회유도 뿌리친다. 둘은 기존의 세계가 자신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음을 안다. 그리고 그 부조리함도 깨닫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델마와 루이스의 의식은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즐겁다. 거대한 자연 속에 서서 “I feel awake." “Wide awake. I don't remember ever feelin' this awake. Everything looks different."라고 말하는 모습은 결연하다. 델마와 루이스의 여정은 ‘앎’을 향한 질주다.

<델마와 루이스>는 로드무비, 버디무비다. 지리적 배경과 복장 등을 볼 때, 서부극의 냄새 또한 짙다. 해당 장르들은 ‘남성적인’ 장르인데, 영화는 당당히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들은 장르의 전형적인 (남성)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후반부에서 편한 티셔츠와 청바지, 카우보이 모자, 화장기 없이 흙먼지로 덮인 얼굴을 하고 총을 능숙하게 다루는 델마와 루이스는 기존의 장르에서 묘사되던 주인공들과 비슷해진 것 같지만, 다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성차에서 온다. 영화는 남성 장르를 전복시키며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델마와 루이스는 도시에서 시골로, 끝없이 뻗은 사막을 거쳐 마침내 그랜드 캐년에 도달한다. 하지만 이러한 서쪽 횡단기의 출구는 없다. 고전적인 서부극에서 주인공들은 마을의 재건을 돕고 홀연히 떠나는 승리자다. 하지만 둘은 사막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무장한 권력 앞에서 전혀 다른 끝을 맺는다. 폭력적인 세계에 맞서는 폭력은 법과 도로망을 이탈하게 만든다. 델마와 루이스는 끊임없이 남성 폭력에 저항하지만, 그 결과는 도로 위를 이탈해 마주한 절벽이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델마와 루이스는 손을 꽉 잡은 채 절벽을 향해 액셀레이터를 밟는다. 그리고 허공에 잠깐 머무른다. 영화는 그 뒤를 보여주지 않는다. <델마와 루이스>는 기존 서사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배제되어 왔던 여성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들이 세상의 경계 밖으로 내몰렸을 때의 결과는 어떠할까. 당연한 죽음일까? 영화가 보여주지 않기에, 까맣게 물든 스크린 위에 괜히 덧그려 본다. 질주의 끝에서 높이 날아오르던 델마와 루이스의 이후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 그 이후가 당연한 떨어짐이 아니라 더욱더 호쾌한 비상이기를. 나는 행복한 델마와 루이스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질문해본다. ‘세상이 변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