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애니웨이> (Laurence Anyways)
트래킹 카메라가 텅 빈 방과 거실, 아파트 현관문을 지나 차가운 거리를 담아낸다. 거리로 나온 카메라는 그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올곧이 담아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호기심, 어색함, 충격, 놀람, 경계, 당황, 적대감 어린 눈빛은 시선의 대상과 화면 밖의 관객을 동시에 응시한다. 그리고 묻는다. ‘무엇’에 던져지는 시선일까. 시선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다가 프레임 밖에 있던 어떤 뒷모습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긴 머리에 투피스, 힐을 신은 누군가가 얼굴을 돌린다.
<로렌스 애니웨이>는 생물학적 성(Sex)을 바꾸어 여성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로렌스, 그가 가로질러 온 10년의 발자취를 회고한다. 문학 교사이자 시인인 로렌스 알리아는 연인 프레드와 열정적인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채색의 옷을 입은 짧은 머리의 로렌스와 화려한 옷차림을 한 붉은 머리의 프레드는 외관상 완벽한 연인으로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로렌스의 35번째 생일이 찾아오고, 로렌스는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성(Gender)을 프레드에게 고백한다. ‘물속에서 숨을 참다가,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죽기 일보 직전에 물 밖으로 나왔다.’ 로렌스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고, 물줄기가 창밖을 가득 채우는 세차장에서 로렌스는 말한다. “더는 못 참겠어. 죽을 것 같아. 난 죽을 거야.” 정체성을 고백한 그날 저녁, 로렌스는 자신을 가리는 모든 옷을 벗고 프레드에게 다가간다. 온전한 ‘로렌스’로 선 순간이다. 물 밖으로 빠져나온 로렌스를, 그의 연인은 감당하기 힘들다. 자신이 사랑했던 당신을, 당신이 부정하는 순간은 견딜 수 없는 시간일 터다. 프레드는 로렌스와의 시간이 부정당하는 느낌에 혼란스럽지만 그의 옆에 머무르고 싶다고 고백하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속으로 뛰어든다.
여성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이후 로렌스의 첫 변화는 의상이다. 이전에는 눈에 띄지 않는 무채색의 옷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숨기고 남성성을 가장했던 반면, 자신이 여성임을 선언한 이후에는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의 옷을 입는다. 진한 화장, 녹색 투피스 정장, 오렌지색의 힐로 표현한 과장적인 여성성을 드러낸 곳은 공교롭게도 교단 앞이다. 교단과 학생들 앞에 선 로렌스와 교실에 감도는 정적은 약 1분 정도 이어진다. 숨도 제대로 못 쉴 것 같은 공기 속에서,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한다. “8페이지 3번째 단락에 관해서 대체 선생님 설명이 부실해서요.” 그 순간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트와 클로즈업되는 로렌스의 얼굴, 자신감을 얻고 복도를 누비는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한없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반항이 아닌 혁명’이라 명하는 로렌스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로렌스는 ‘이질적’, ‘특이함’, ‘비정상’이라는 이유로 늘 타인과 익명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고, 학교로부터 해고당하고, 거리에서 폭력을 당한다. ‘하늘 아래 한계는 없어’라고 말하며 로렌스에게 가발을 선물하던 프레드는 끝내 주변의 시선에 포획당하고, ‘남자’를 원하는 자신의 욕망을 따른다. 로렌스와 프레드의 이별을 끝으로, 영화는 5년의 시간을 건너뛴다. 1995년, 프레드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고 로렌스는 여성, 그리고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옛 연인을 잊지 못한 로렌스는 프레드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며, 그저 멀리서 바라본다. 그러던 어느 날, 프레드에게 소포가 도착한다. 로렌스 알리아의 <그녀에 대해>. 글을 읽어나가던 프레드는 폭포처럼 몰려오는 감정에 숨을 쉬기가 어렵다. 그녀를 함락하는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기도 전에, 프레드는 로렌스가 남긴 흔적을 발견한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재회한 두 사람은 전부터 가보길 꿈꾸던 곳으로 떠난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땅과, 파란 하늘에서 형형색색의 옷이 비처럼 내리는 이곳, 경계 너머의 ‘블랙섬’은 기존의 세계와 다르게 다양한 빛깔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환하게 미소 짓는 로렌스와 프레드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가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둘의 행복이 영원할 거라는 어떤 기대감이 든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간다. 로렌스와 프레드는 섬에서 파니와 알렉상드르 커플을 만난다. 알렉상드르는 여자에서 남자로 성전환수술을 했지만, 이에 대해 파니는 “하지만 달라진 건 없어요. 알렉상드라건, 알렉상드르건. 마음이 중요한 거죠.”라 말한다. 사랑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구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파니를 보며, 로렌스는 희망을 얻지만 프레드는 그들의 초라한 행복을 비난한다. “나처럼 살아. 네 인생을 즐기고 사랑도 실컷 해. 누구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어”라고 말하는 로렌스에게, 프레드는 아무리 노력해도 다 가질 순 없다며, 네 선택과 상실을 감수하라 말한다. 프레드는 아직 로렌스를 사랑하지만 그를 감당하지는 못한다고, 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치고 싶지는 않다며, 자신은 남자를 원한다고 소리친다. 블랙섬은 ‘다름’을 혐오하고 처벌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탈주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판타지적 공간이다. 경계 너머의 위반과 해방, 기존 정의의 해체를 목격했지만 로렌스와 프레드는 기존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아니라 그들 바깥,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에서 온다.
로렌스와 프레드가 겪는 세계는 현실이다. 이와 대조되는 이상적인 세상은 앞서 말한 블랙섬, 혹은 로즈 패밀리를 통해 그려진다. 로렌스가 거리에서 피범벅이 된 상태로 도움을 구할 때,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지만 베이비 로즈가 그를 도와준다. 로즈 패밀리는 로렌스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로렌스가 존재 그대로 살게끔 돕는다. 이러한 로렌스의 변화는 동시에 어머니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로렌스가 여성으로 살겠다고 고백한 날, 어머니는 그 사실 자체보다 남편의 반응을 더 신경 쓴다. 거리에서 린치를 당한 로렌스가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해도 그녀는 남편 때문에 이를 거절한다. 어머니는 늘 TV만 보는 남편을 간호하며, 남편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여성이 되는 과정에 동참하면서, 어머니 또한 남편의 TV를 부수고, 집을 나온다. 어머니는 로렌스에게 “넌 성별을 바꾸었는데 난 주소도 못 바꾸냐”라고 당차게 말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다. 이렇게, 기존의 세계가 정한 경계선에 흠집을 내는 미세한 균열과 소음은 변화와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낸다. 로렌스와 프레드의 사랑은 앞으로 어찌 될지 담보할 수 없지만, 영화는 그 주변을 비추며 우리에게 미미하지만 명백한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블랙섬에서의 일탈 이후, 카메라는 1999년 몬트리올로 이동한다. 3년 만에 몬트리올로 돌아온 로렌스는 작가로서 인터뷰에 임한다. 로렌스를 인터뷰하는 기자의 시선은 로렌스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한다. 기자는 로렌스를 차마 바라보지 못한다. 로렌스는 기자에게 “인터뷰 시작하고 단 한 번도 절 안 쳐다보셨잖아요. 그렇게 불편하세요? 그래요?”라고 묻고, “시선이 그렇게 중요하세요?”라고 되물은 기자는 그제야 로렌스를 바라본다. 로렌스를 응시하는 기자의 시선은 관객들과 맞닿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한 번 묻는다. ‘당신은 로렌스를 바라보고 있나요?’ 영화의 오프닝, 글의 첫 문단으로 돌아가 보자. 트래킹 카메라가 텅 빈 방과 거실, 아파트 현관문을 지나 차가운 거리를 담아낸다. 거리로 나온 카메라는 그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올곧이 담아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시선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다가 우리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누구일까.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로렌스와 프레드의 첫 만남을 그리며, 이렇게 답한다. “Laurence Anyways”, 어찌 됐든 로렌스라고.
정의되지 않는 세계의 틈에서 살아 숨 쉬는 로렌스가 있다. 사랑이 있다. 세계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던, 그래서 그 틈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로렌스가 여기 분명히 존재한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21세기를 살아갈, 그리고 살아가는 로렌스를 응원한다. 자기 자신이 되는 여정 속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모든 이들, 이들 모두가 어찌 됐든 간에 로렌스다. 그리고 바라건대, 언젠가는 로렌스와 프레드가 마음껏 "우리가 자랑스러워"라고 외치며, 더욱 자유롭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길. 둘의 사랑이 다시, 새롭게 쓰여지길.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엣나인필름의 서포터즈 아트나이너 10기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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