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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응밍 Apr 22. 2020

할리우드, 그리고 여성

<우먼 인 할리우드> (This Changes Everything)


 <우먼 인 할리우드>는 188편의 블록버스터와 할리우드 미디어 산업 종사자 96명의 인터뷰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할리우드 미디어 산업 안과 밖에 만연한 기회 불균등과 성차별에 대해 폭로한다할리우드의 차별 관행에 대한 배우감독제작자 등의 경험적 목소리와 함께탄탄한 증거 자료들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출연진들이 우리가 모를 수 없는 배우라는 걸 고려할 때이들이 말하는 차별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신인 때 여자친구 역을 맡으며 생각했죠.
거머리처럼 살아남아서 이 판을 뒤집어버리겠어.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겠어!"

- 케이트 블란쳇

 

세상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내 몸을 더 중요시한다는 걸 알게 됐다 상상해보세요.
어릴 때부터 객체가 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탈리 포트만


제 스크린 테스트를 보고 가슴이 너무 작다면서 제작사에서 지시가 내려왔대요.
16살 여자애를 보고 가슴이 너무 작다고 말했다고요?

-클로이 모레츠

 

 미디어는 누구의 가치와 이야기가 중요한지 전달하고누군가의 가치와 이야기를 대변한다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고현실을 구성한다남성이 만든 방송에서 여성은 남성을 위한 존재주변화되는 존재다구조 속에서 타자화되어 재현되는 여성은 복잡성이 결여되어 있다. 할리우드에서 여성은 대부분 아름답거나약자거나혹은 처단해야 할 존재로 묘사된다. 애초에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 자체가 소수다그마저도 여성들의 신체 부위를 파편화해서 부각하는 등남성 주체의 시선으로 대상화된 '객체'에 머무른다. 이에 대해 로즈 맥고언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지 않는다며남성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된다고 고백한다.


 할리우드의 차별적 관행을 알리고 개선하기 위해 지나 데이비스는 '미디어 젠더 연구소'를 설립해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한다. “이제는 달라졌는데도대체 무엇이 문제냐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라고 말하는 남성 제작자들에게 지나가 내민 데이터는 그들의 입을 닫기에 충분했다남성과 여성이 반반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미디어 속 여성의 존재감은 터무니없이 작다. <겨울왕국>, <히든 피겨스등처럼 여성들이 주연인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지 않았냐는 세상의 질문에 지나는 이렇게 답한다. “돈이야 엄청나게 벌었지만그게 다예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온 세상이 호들갑을 떨지만, 사실상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2017년 기준 흥행영화 상위 100편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보다 화면에 두 배 더 노출된다. 전체 이용가 어린이 미디어에서여자 캐릭터는 남자 캐릭터보다 노출이 3배다. 동시에 등장하는 여성이 절대적으로 소수다어린 시절 접하는 미디어에서부터 여성은 세상의 반도 차지하지 않아중요하지 않아그저 열등한 시민이야라고 말하는 셈이다미디어는 여성 캐릭터로부터 영감을 받을 기회를 여성들에게 주지 않았다미국의 목소리문화적 서사에 여성의 이야기는 들어가지 못했다하지만, “볼 수 있으면 될 수도 있다. (If they can see it, they can be it)”. <메리다와 마법의 숲>, <헝거게임>이 개봉한 뒤양궁을 배우는 소녀들의 수가 105% 증가했다이러한 상황을 ‘CSI 효과라고 말한다. 2000년 방영된 <CSI 과학수사대>에서 여성법학자가 나온 뒤, 법의학 분야 여성들 숫자가 현저히 높아진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여학생의 의대 진학률을 높였다하나의 관점만 보여주면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권리를 잃게 만든다무언가를 꿈꿀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하는 건 명백한 차별이며하나의 권리, '인권'을 잃게 만드는 부조리다.


 왜 이런 미디어의 재현이 반복되는 걸까? <우먼 인 할리우드>는 기울어진 산업 구조의 문제라 답한다영화산업에서 여성은 예술가로 인식되지 않았다거의 한 세기 동안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여성 감독은 캐서린 비글로우가 유일하다업계에 종사하는 평론가배급자 등, 대다수가 남자다남성 감독 영화의 배급과 홍보는 훨씬 큰 규모로 이루어지고자연스럽게 두 번째 영화의 시작은 쉬워진다반면에 여성은 큰 성공을 이뤄도 제자리다여성 중심 영화의 성공은 여전히 우연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일할 권리를 박탈당하기도 한다. 여성이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도약할 때유리천장과 대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시작, 무성영화 시대에는 여성들이 각본연출제작을 맡았고 심지어 회사까지 소유했다영화산업은 처음부터 특정 젠더에 국한된 산업이 아니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넘어가는 때에, 여성의 기회가 박탈당하기 시작한다. 부유한 지배층 남성들이 음향 기술 발전을 위해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영화 산업은 남성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영화는 어느 순간 남자의 것이 된다수많은 여성의 업적이 수십 년에 걸쳐 지워졌고, 할리우드 내 차별이 뿌리내리게 된다.

 

14세 때 연기를 시작했는데 남자 스태프 150명 사이에 여자는 저뿐이었어요.
의상팀이든 미술팀이든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죠.

- 리즈 위더스푼


 지금까지 할리우드는 차별적 고용을 규제한 적 없다. 1969년 정부가 영화계 차별 관행을 수사했지만연방정부의 관대함으로 여성차별은 개선되지 않았다. 최초로 할리우드의 차별에 법률적으로 접근한 건 80년대 여성 감독 6인이다이들은 1949~1979년까지 업계 여성들에게 배정된 일감의 통계를 낸다전체의 0.5%에 불과한 수치였다영화 속 비유를 그대로 가져오자면, 이는 100개의 쿠키 중 99개 하고도 반은 남자아이들이 먹고남은 반 조각을 먹기 위해 여자아이들끼리 경쟁하는 것이다. 1983년 감독조합은 제작사를 상대로 차별 소송을 제기하지만 기각당한다영화계의 차별 방지는 법적 의무 없는 자발적 협조와 준수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자발적 규제는 이미 견고하게 형성된 시스템 속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미디어 산업의 고용 형태는 거미줄 같다. 방송국은 제작자에게제작자는 제작사와 에이전시에게제작사와 에이전시는 방송국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서로의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안전망이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다. 에이전시 감독 명단의 대부분은 남성이다여성이 남성보다 돈을 덜 받게 되면 에이전시는 돈을 벌기 위해 남성 감독작가를 추천한다제작사는 실패 없는 성공을 위해 경험자를 선호한다. 결국 제작사로 가는 명단에 여자 감독은 없다이러한 굴레 속에서여성들은 구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네 자리를 지켜나서지 마입 다물어라는 말들 속에서.


디렉팅을 줄 테니 무릎에 앉으라는 감독도 있어요.
톰 행크스도 감독 무릎에 앉나요?

- 샤론 스톤


 2017년 10월, 할리우드에서 하비 와인스타인에 관한 대대적인 ‘#미투(#MeToo) 운동’이 시작된다. 이는 여성들의 성폭력 방지 연대운동 ‘타임스업’(Time’s up)으로 이어진다. 성희롱과 성폭행은 고용차별의 징후다. 오래된 관행, 구조 속에서 남성이 권력을 어떤 식으로 휘두르고 여성을 착취했는지 드러났다. 남성 권력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고 연대한 여성 배우, 인력들은 세계적으로 큰 지지와 응원을 받았다지난 세월 동안여성들은 더 이상 싸워서 얻어야 할 건 없다고 여겼다하지만 여전히 싸워서 얻어야 할 건 많다영화는 침묵을 깸으로써 싸움을 시작한다. ‘This changes Everything’라는 영화의 원제는침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동시에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포부를 밝힌다여성들이 침묵을 깨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함께 말하고 들으면서 연대해야 한다동시에 젠더 불평등은 차별을 받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사회 전체의 문제이자 인권의 문제다남성인 FX 대표가 적극적으로 움직여 백인 남성 감독의 비율을 89%에서 49%로 조정한 것처럼변화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참여해야 진척이 된다여전히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많다. 어려운 여정이 계속되겠지만 모두가 연대해 평등을 향해 나아간다면우리 앞에 펼쳐질 가능성은 무한할 것이다.


 어린 시절테이프가 다 늘어질 때까지 돌려봤던 비디오들을 떠올려 본다어떤 이미지들을 보고 자랐고어떤 시선을 따라갔고어떤 가치들을 내면화했는지. 여자아이들이 어떤 여성을 꿈꿨고또 지금 꿈꾸는지이 지난한 싸움이 언젠가 끝자락을 마주할 때우리 이후의 아이들은 다양한 세계를 담은 이야기를 만나길 기대한다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꿈꾸길 바란다. 화면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마주하길 바란다그리고 그때는아마 모든 게 변화하지 않을까?

 

업계는 우리를 항상 부정해왔어요.
그렇게 여자들은 그들의 욕망, 욕구, 두려움을 신경 쓰지 말아야 했죠.

제스카 차스테인


여자의 목소리를 내는 영화가 더 많아져야 해요.
여자가 원하는 것, 가치 있게 여기는 것,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메릴 스트립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엣나인필름의 서포터즈 아트나이너 10기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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