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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응밍 Apr 22. 2020

헨리, '왕'의 탄생

<더 킹: 헨리 5세> (The King)

A King has no friends. Only followers and foe.


 <더 킹: 헨리 5>는 셰익스피어의 랭커스터 4부작의 마지막 작품 <헨리 5>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중세 잉글랜드 배경의 사극 정치 드라마다.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왕, 헨리 5세는 프랑스 정복을 완성한 이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또한 헨리 5세가 아젱쿠르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의 캐서린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영웅적 과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영화 <더 킹: 헨리5>는 그의 위대한 업적보다 왕자에서 헨리 5로 변모하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주 서사에 담고 있다.


 15세기 초, 선왕 헨리 4세 시절 끊임없이 내란에 시달리는 잉글랜드를 보아 온 왕자 은 왕좌에 뜻이 없다. 그저 기사 존 폴스타프와 어울려 술과 여자에 취해 방탕한 생활을 일삼을 뿐이다. 그러던 와중 할은 희생을 최소한으로 하고 평화를 바라는 신념에 따라, 동생 토마스가 이끄는 슈루즈버리 전투에 참여한다. 전투에서 반란군 총사령관격인 훗스퍼와의 일대일 대결에서는 승리했지만 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체감하게 된다. 전투로 인해 기사도적 영웅으로 떠오른 왕자 할의 모습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었겠지만, 카메라는 더러운 골목에서 토악질하는 할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던 그에게 왕실 고문 윌리엄이 찾아와 아버지가 후계로 지목한 토마스의 사망 소식을 알린다.


 그렇게 헨리 4세의 왕위를 물려받은 할의 나이는 스물다섯, 잉글랜드의 젊은 왕이 탄생한다. 즉위 후 할은 자신이 아버지와 다르다는 걸 끊임없이 피력한다. “They were my father’s enemies, not mine.”이라고 말하는 할의 모습은 그가 가진 평화의 가치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할의 즉위 이후, 이웃 나라들로부터 선물이 쏟아지는 가운데 프랑스의 왕세자는 테니스공 하나를 선물로 보낸다. 명백한 조롱의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왕은 이 무례함을 모르는 척한다. 신하들이 프랑스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함에도 할은 자신의 이상을 고수해나간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왕명으로 보내진 자가 암살계획에 대해 자백하게 되고,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잉글랜드의 상황과 계속되는 프랑스의 도발은 그가 추구하는 평화적 이상을 지키기 어렵게 만든다.


 할은 프랑스를 침공할 결단을 내리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권력의 장 속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 폴스타프를 찾아가 그의 조력을 요청한다. 영화에서 폴스타프의 역할 또한 셰익스피어의 희곡과는 상당히 다르다. 원작에서 폴스타프는 무능한 인물로 헨리 5세에게 버림받고 쓸쓸하게 죽는다. 하지만 영화의 폴스타프는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유능한 기사로, 할의 친구이자, 전우이자, 유사 아버지다. 이러한 영화적 각색 덕분에 관객들은 할과 헨리 5세라는, 한 인간의 내면에 한 발 더 다가간다. 1415,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이 시작되고 그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와 트루아 조약이 스크린 위에 재현된다. 그럴듯한 명분과 대의, 국가와 애국을 내세워 시작된 전쟁의 모습은 생지옥과 같다. 한 덩어리가 되어 누가 누군지 구분조차 안 되는 진흙탕 속에서 꿈틀거리며 서로를 처절하게 죽고 죽이는 모습은 전쟁의 민낯을 가감 없이, 미화 없이 보여준다.


 영화는 왕위에서 도망치던 할이 결국 위대한 왕’, ‘헨리 5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며 권력의 딜레마, 만들어진 평화의 이면과 본질 등을 보여준다. 평화를 꿈꾸던 이상주의자가 오히려 그로 인해 변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아이러니함을 헨리 5세가 깨닫는 건, 자신과 결혼을 앞둔 프랑스의 왕녀 카트린과의 대화하는 순간이다. 영화는 중세의 권력이라는 남성 투쟁의 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유독 강한 존재감을 내보이는 두 여성이 등장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프랑스 왕세자의 누이인 카트린과 헨리 5세의 여동생이자 덴마크의 왕비인 필리파다. 필리파는 왕에게 매사에 현명하게 처신해야 함을 알리며 직언한다. 카트린은 헨리 5세가 걸어온 길에 잔재하는 기만과 그 본질을 꿰뚫으며 질문한다. 권력의 장에서 삼켜진 남성들을 대신해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 속 여성의 목소리가 유독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마지막에 헨리 5세가 카트린에게 자신에게 진실만 말해달라 약조하는 장면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더 킹: 헨리 5>는 배우들의 연기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헨리 5세 역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열망, 치기 어린 왕자 할의 내면부터 헨리 5세로서의 고뇌와 번민, 외로움, 그리고 군주로서의 모습을 섬세하게 스크린에 담아내며 그의 개인적 서사를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그중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해 연설하는 장면은 전 세계의 관객들이 왜 이 배우에게 주목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이다. 평화를 지향하던 할이 냉혹한 전쟁의 신' 헨리 5세로 각성하는, 복잡한 청년 왕의 초상을 올곧이 담아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배우의 힘이 아닐까. 조엘 에저튼의 팔스타프는 무게감 있지만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티모시와 함께 극의 중심을 쥐고 서사를 이끌어나간다. 다소 건조한 극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프랑스 왕세자 역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 또한 주목할 만하다. 외에도 숀 해리스, 벤 멘델슨 등. 모든 배우들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해내고 있다. 이들의 걸출한 연기만으로도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한 만큼 대사들 또한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다소 느린 전개와 호흡에 누군가는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전투 시퀀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스펙터클이라기보다는 처절하고 참혹한 생지옥의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이 건조하고 담담한, 어쩌면 허무하기까지 한 공기 속에서 왕자 할이 어떻게 헨리 5세로 변모하는지에 주목해서 본다면, 시대극 이상의 그 무언가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왕위로부터 멀어지려던 할이 왕위에 올라 어떠한 이상을 추구하려 했는지, 권력의 장에서 어떠한 기만을 당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지. 그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방황하며, 필연적인 외로움과 권력의 파괴성을 견디는 그의 내면의 강렬함은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풍성하게 채운다. 진실을 마주한 헨리 5세의 모습과 귓가에 울리는 군중들의 “King Henry!”라는 외침은 서사 속에서 헨리 5세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다시 돌아보게 만듦과 동시에, 그 이름 아래 가려져 있던 것들을 스크린 밖으로 돌출시킨다.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엣나인필름의 서포터즈 아트나이너 10기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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