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와인드 리뷰|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2020)'
[씨네리와인드|최은민 리뷰어] “슬픔을 내보이지 말기(혹은 적어도 슬픔에 흔들리지 않기). 그 대신 슬픔 안에 내포되어 있는 사랑의 관계와 그것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거리낌 없이 주장하기.”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애도 일기>의 한 대목이다. 슬픔에 흔들리지 않으며,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사랑에 대해 말하라니. 누군가의 죽음 안에서 어떤 사랑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발견한다 한들, 밀려오는 슬픔의 파도가 그 사랑을 압도하지 않을까?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이러한 물음에 답을 주는 듯하다. 해당 작품은 커스틴 존슨이 아버지 딕 존슨의 죽음을 그리는 다큐멘터리다. 픽션을 통해 딕 존슨의 가짜 죽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출해내고, 논픽션을 통해 그의 실제 삶과 기억을 담아내며 삶과 죽음 사이를 유머러스하게 포착한다. 커스틴 존슨이 아버지의 죽음을 찍게 된 이유는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 또한 알츠하이머로 인한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커스틴 존슨은 아버지의 죽음을 예행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한다. 영화에서 딕 존슨은 다양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누군가가 떨어트린 물건에 머리를 맞아 죽거나, 공사 현장에서 인부가 휘두른 자재에 찔려 피 흘린다. 집안 계단에서 굴러서 죽고, 자동차 사고로 죽는 등. 영화는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수 있는 딕 존슨의 죽음을 연출한다. 죽음 이후 천국에 머무르는 딕 존슨의 모습을 환상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심지어는 그의 가짜 장례식을 치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딕 존슨의 죽음 이후, ‘컷!’ 소리와 함께 다시 삶이 펼쳐진다. 가짜 죽음을 찍는 과정에 대한 메이킹 필름이 삽입되고, 여전히 살아있는 딕 존슨의 일상이 이어진다. 딕 존슨은 자신의 대역 배우(스턴트맨)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저게 나야? 아프겠네.”라고 말하기도 하고, 친구들 혹은 손주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한다. 가짜 장례식에 모인 친구들은 딕 존슨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기억을 진심으로 추억하고 슬퍼한다. 딕 존슨은 이러한 풍경을 뒤에서 가만히 바라본다. 장례식이 끝나고, 딕 존슨은 문을 열고 들어가 친구들 사이로 걸어가 악수와 포옹을 나눈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딕 존슨의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려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반드시 '삶에 대한 말하기'를 동반한다. 그 안에서 커스틴 존슨과 딕 존슨,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이전에 겪었던 상실의 기억들을 건져 올린다. 동시에 지금 함께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며 특유의 유쾌함으로 현재의 삶을 긍정한다. 하지만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시간은 흘러가고, 딕 존슨의 기억력은 점점 더 나빠진다. 질병이 딕 존슨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 딕 존슨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커스틴 존슨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한 일련의 시간을 거쳐, 종국에는 다가올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 인정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커스틴 존슨이 휴대폰에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이다. “내가 아는 건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 내가 아는 건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 내가 할 말은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원하라, 딕 존슨’이다.” 그리고 그는, 문을 열고 나가 그 앞에 서있던 자신의 아버지를 힘껏 끌어안는다.
커스틴 존슨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아버지의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그의 삶을 축복한다. 삶은 반드시 죽음으로 이어지며, 그 과정을 견뎌내는 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건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그 생에 녹아있는 사랑은 이별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감사한 것이다. 커스틴 존슨은 이를 기억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고,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안길 슬픔을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사랑으로 덮어낸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가 죽음과 삶을 이어내는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무척이나 생생하게 다가온다. 부녀의 사적인 기록을 넘어, 우리들에게도 필연적이고 보편적일 수밖에 없는 ‘끝’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관객 모두가 커스틴 존슨의 방식처럼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삶을 기록하고 보존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예정된 상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배울 수 있다. 슬픔 안에 내포되어 있는 사랑의 관계를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그에 대한 표현을 거리낌 없이 하려는 태도. 그때서야 우리는 죽음에 대해 무작정 슬퍼하지 않고, 죽음 앞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던 ‘삶’을 힘껏 사랑할 수 있다. 위안은 반드시 여기에서, 끝내 우리를 찾아온다.
씨네리와인드 대학생 기자단 4기로 활동하며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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