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보경이> (A Dangerous Woman)
‘제대로 낚였다.’ <4학년 보경이>와의 첫 만남은 당황함과 황당함을 일직선으로 연결했을 때, 그 어느 중간에 나 홀로 선 느낌이었다. 9월의 GET9은 윤가은 감독의 <콩나물>, 김보라 감독의 <리코더 시험> 한가람 감독의 <장례난민>, 그리고 이옥섭 감독의 <4학년 보경이>, 총 4편의 단편이 한 섹션으로 묶여 상영되었다.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콩나물>, <리코더 시험>, <장례난민>을 떠올릴 때, 당연히 <4학년 보경이>의 화자는 11살 남짓의 보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의 범주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한 이 섹션에서 만난 ‘보경이’는 참 낯설게도, 졸업을 앞둔 동양화과 4학년. 속된 말로 화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교에서 ‘화석’이라고 규정됨은, 학교 밖 세계에서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단계다. 보경 또한 졸업을 위해 작업실에 박혀 졸업 작품을 그려나가고 있다. 4년째 연애 중인 남자친구 덕우와, 익숙한 거리에서, 익숙한 체온을 나누고, 익숙한 공기가 맴도는 작업실에서, 익숙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을 터다. 하지만 보경에게는 이 세계가 지루하다. 설레지 않는다. 지난 4년 동안 쌓아 올린 일상은 이미 딱딱한 퇴적물 같다. 깨고 나와야 할 것 같은 답답함, 익숙함이 숨통을 막는다. 그러다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떨리는 눈짓과, 미약하게 피어나는 공기는 보경의 마음에 바람을 불어넣었고, 익숙하지 않은 감각은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다가온다. 그 사람의 한 마디에 나도 모를 의미부여를 하고,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뭔가를 내뱉었다. 어쩌지. 4년 된 연인이 있는데, 선배가 좋아졌다.
<4학년 보경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익숙한 세계의 틈을 비집고 불어온 한줄기 바람이, 어떻게 거세지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어 닥치는 바람에 관객들은 완벽히 포획당할 거다. 귀엽고 자그마한 ‘4학년 보경이’라 오해하며 영화를 재생해도 괜찮다. 나 또한 거하게 낚여 영화를 봤지만 이미 이옥섭 감독의 세계에 매료된 지 오래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영상 문법이 아니라 익숙함과 일상성을 깨부수는 연출로 내러티브의 리듬과 위트를 만들고, 이 낯섦은 우리에게 충분한 쾌감을 선사한다. 오란씨와 포카리스웨트의 CM송, 카드캡터체리의 주제가가 삽입되는 영화를 상상이라도 해봤는가? <4학년 보경이>는 그 이상을 보여준다. 유쾌하고 발칙한 메타포로 가득 찬 28분, 이옥섭 감독의 세계에 사로잡히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보경의 마음에 톡 쏘는 오렌지빛 바람이 불며 균열을 일으킨다. 보경은 이 상황에서 어떡해야 할까. 부인하거나, 숨기거나.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보경은 자신의 욕망에 귀를 기울인다. 정말 용기 있는 선택이다. 보경은 단순히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선언한 거다. 보경이 덕우와 함께 버려진 소파와 중고 선풍기를 과방으로 들여놓는 여정에서, 보경은 4년을 함께한 덕우에게 자신의 마음이 한결같지 않음을 고백한다. 덕우는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보경의 선언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보려 한다. 그렇게 작업실에서 마지막 거사를 치르는 그들. 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덕우가 죽었다. 창문 밖에서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삶의 희비가 교차하는 아이러니한 순간, 영턱스클럽의 정(위험한 이별)이 울려 퍼지면서 보경의 머릿속에서는 덕우와의 마지막 하루가 스쳐 지나가고 이제 자신이 처하게 될 별별 상황들이 펼쳐진다. 이때 보경이 달려갈 곳은 딱 한 곳, 선배의 품이다. (이후가 클라이맥스지만, <4학년 보경이>를 보신 분들은 내용을 다 알 거고, 아직 보지 않았다면 영화를 직접 보는 것을 추천한다. 구교환X이옥섭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되어있다.)
학교와 사회의 경계에 슬며시 발을 걸친, 4학년 졸업반. 졸업 후에는 세상이 바뀐다. 그리고 그 변화의 조짐은 보경의 주위를 슬그머니 맴돌며 찾아왔다. 그 결과가 어떠하던 익숙함에 작별을 고하며. 결국엔 보경과 덕우, 둘 다 자의든 타의든 딱딱하게 퇴적된 일상의 균열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또한 <4학년 보경이>의 영제는 <A Dangerous Woman>이다. 보경이와 나란히 병치되는 ‘위험한 여자’라는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무슨 뜻일까? 학교 밖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졸업 작품에 매진해야 할 4학년 보경이가 어떤 식으로 위험할 수 있을까? 미술도구를 흉기로 들기라도 했던 걸까? 거기다 ‘위험한’ ‘여자’라니. 기나긴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이렇게 짝짜꿍을 잘 이루는 단어는 그 어디에도 없을 거다. 보경의 마음이 변한 거? 4년 동안 쌓이고 쌓여 딱딱해진 신뢰를 깨부순 거? 아니, 우리 모두 안다. 우리 모두 한결같을 수 없다. 보경을 위험한 여자, 나쁜 여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속 깊은 저 구멍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무언가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지는 않은가? 아닌 척하지 말기. 나는 보경을 “Honest (wo)man”이라 부르고 싶다.
신뢰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나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음을 알고 있어 괴롭다. 한결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보경이가 밉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닌 척하지 말기.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엣나인필름의 서포터즈 아트나이너 10기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