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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응밍 Mar 04. 2021

[Opinion] 언어의 틈바구니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핍 윌리엄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책장 맨 밑 칸, 먼지가 수북이 쌓여 정체 모를 퀴퀴함을 풍기던 묵직한 사전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의 호기심은 두툼한 사전에 스며든 먼지나 그 무게를 아랑곳하지 않았고, 겨우겨우 사전을 바닥에 내려놓고서는 아무 쪽이나 펼쳐보곤 했다. 뜻 모를 단어들을 눈으로 더듬거리고 입 안에서 굴려보다가, 가족들에게 오늘 만난 단어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들곤 했다.


 멋진 일이었다. 크기로 보나, 무게로 보나, 색조와 글씨체의 심각함으로 보나, 어렸던 나에게 ‘사전’은 참 대단한 물건이었다. 일상에서 부닥치는 낯선 말들을 척척 해결해주는, 참 신기하고도 고마운 지성적 존재였달까. 그렇기에 감히 사전에 대한 불온한 의심을 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지극히 온당해 보이는 사전의 지성 또한 누군가에 의한 것이다. 핍 윌리엄스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작가는 "단어들이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단어들을 정의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필두로, 실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 역사를 재구성해낸다. (해당 사전은 1857년 영국 언어학회에서 제안된 이후 자료수집을 거쳐 1879년에 사전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다. 사전 제작에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1884년 제1권이 출판되고, 1928년 제12권이 출판되어 초판본이 완성된다. 소설은 1886~1928년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다만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사전을 만든 남성 편집자들이 아니라, 그 주변에 머물던 이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작가는 평생을 스크립토리엄(사전 편찬 업무를 하는 곳의 명칭, 전 세계 자원봉사자들이 보내온 단어 쪽지를 보관하고 분류하여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했다.)과 함께한 에즈미라는 인물을 새롭게 탄생시키고,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을 적절히 섞어 매력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다. 에즈미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당시의 여성 참정권 운동, 1차 세계대전까지 아우르며 다양한 인물(특히 여성)들을 조명한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이야기는 에즈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다. 에즈미는 사전 편집자인 아빠를 따라 스크립토리엄에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낸다. 아빠의 무릎에 앉아 단어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단어 분류법을 배우던 에즈미에게 스크립토리엄은 일종의 놀이터다. 단어들을 분류하는 테이블 아래, 어른들의 다리 사이를 기어 다니며 놀던 에즈미는 어느 날 떨어진 단어 쪽지를 줍는다. ‘여자 노예(bondmaid)’라는 단어다. 버려진(사전에 실리지 않는) 단어의 운명을 알았던 에즈미는 몰래 쪽지를 챙겨, 가사노동자 리지의 트렁크 속에 보관한다. (실제로 1901년 한 독자가 보낸 편지를 통해 사전에 ‘여자 노예’가 누락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에도 에즈미는 단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를 기다리고, 버려지거나 유실된 단어 쪽지들은 트렁크에 차곡차곡 쌓인다.


 에즈미는 스크립토리엄에서의 시간을 통해 모든 단어들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단어들은 다른 단어들보다 중요하다. 일상적으로 말해질지는 몰라도, 일상적으로 기록되지 않으면 사전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단어들은 (누가 말하는 걸 들어본 적도 없고 사용되는 걸 상상하기도 어려웠지만) 어떤 대단한 사람이 그걸 종이에 적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사전에 등재되기도 한다. 사전에 기록된 단어들 또한 저마다에게 다른 의미를 갖지만, 주류의 시선으로만 그 의미가 해석된다.


 첫 정혈을 겪은 에즈미는 단어 분류함을 뒤져 ‘생리하다(menstruate)’라고 쓰인 쪽지를 찾아낸다. 대표 쪽지에는 두 가지 정의가 쓰여 있었다. 첫 번째는 ‘월경혈을 배출하다’였고, 두 번째는 ‘(생리혈로 그렇게 되는 것처럼) 부정(不淨)하게 되다’였다. ‘생리 상태(menstruosity)’는 생리를 하고 있는 상태를 뜻했다. 그리고 ‘생리를 하는(menstruous)’에는 한때 ‘끔찍할 정도로 더러운, 오염된’이라는 뜻이 있었다.


 모든 편집자, 그리고 거의 모든 조수가 남성이었으며, 자원봉사자 또한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단어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증거로 사용된 문학 작품과 책자, 신문 기사들 또한 대체로 남성에 의해 쓰였고, 자금줄을 쥐고 있던 옥스퍼드 대학 출판국의 이사진도 남성이었다. 이들이 선별한 지식과 지식 사이에는 빈 틈이 있을 수밖에 없고, 에즈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내가 경험하는 것을 나타내는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책과 분류함을 뒤지던 그 모든 날들을 떠올렸다. 사전을 편찬하는 남자들이 고른 단어들로는 불충분했다. 너무도 자주 그랬다.”


 에즈미는 교육받은 남성의 말들이 여성을 포함해 교육받지 못한 계층의 말들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종이에 기록된 적 없는 수많은 단어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 단어들이 사전에 등재되는 단어들과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즈미가 수집한 어떤 단어들은 이미 분류함에 있는 단어였지만, 훨씬 많은 단어들이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가사노동자인 리지,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 메이블,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든 배우 틸다, 생선 배를 가르거나, 옷감을 자르거나, 화장실을 청소하는 여자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들 등을 통해 알게 된 단어들을 수집하고 보관한다. 이들의 입말과 속어, 은어를 적극적으로 수집해 그 목소리와 단어를 사전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는 에즈미는 상스러운 욕설을 기록하기도 하고, 기존 사전에 등재는 되어 있지만 사전에는 명시되지 않은 다른 의미를 부각해 기록하기도 한다. '자매들(sister)’이 대표적이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서프러제트)인 틸다는 '자매'를 동지들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지만, 스크립토리엄 분류함의 그 어떤 쪽지에도 '동지들'이라는 의미는 없었다. 이에 대해 에즈미는 '자매들(sister)’을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며 연대하는 여성들; 동지들'로 의미화하고, 틸다의 목소리를 이에 대한 예문으로 기록한다. (“자매님들, 투쟁에 동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틸다 테일러, 1906년)


 에즈미는 언어를 들여다보고 기록하며, 자신이 수집한 단어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 “이 단어들 말이에요, 이것들은 숨어들려고 나한테 온 게 아니었어요. 이 단어들은 바람을 쐬어야 돼요. 읽히고, 공유되고, 이해되어야 해요. 어쩌면 거부당할 수도 있겠지만, 기회가 주어져야 된다고요. 스크립토리엄에 있는 다른 모든 단어들처럼요.” 에즈미의 담대한 선언처럼, 그는 평생을 '잃어버린 단어들'을 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는 혼자가 아니다. '잃어버린 단어'들을 사용하던 평범한 사람들, 글을 모르는 사람들, 잊힌 사람들의 목소리가 에즈미를 이끈다.



언어의 틈바구니에서



 어린 시절에는 두꺼운 사전을 모조리 씹어 먹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틀렸다. 이 세상에 둥둥 떠다니는 언어와 의미들은 곧이곧대로, 온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떤 단어와 의미는 체계에서 배제되고, 구겨진다. 어떤 단어와 의미는 사전에 존재하지 않고, 언뜻 촘촘해 보이는 사전 속 언어의 망은 성기고 느슨하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말을 이해한다. 개인의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고, 이 다름은 의미의 차이를 만든다.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달라진다. 하지만 존중받지 못하는 경험이 있고, 그렇기에 권위로부터 밀려나는 말과 단어, 목소리가 있다.


 그렇지만 분명 살아있는 말들이다. 인정받는 주류의 언어가 아니기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단어들, 목소리들이 숨 쉬고 있다. 이 단어들은 세계의 이면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기에 언어의 틈바구니에서 미약하지만 생생하게, 빼꼼히 고개를 내민 '잃어버린 단어들'을 잡아채는 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배제되거나 왜곡되었던 단어를 재건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의 언어가 증언하는 현실의 부조리를 목격하고 새로운 의미를 그릴 수 있다. 가사노동자 리지가 ‘여자 노예(bondmaid)’라는 단어를 ‘연결돼 있는 여자’, 즉 '사랑, 헌신 혹은 의무에 의해 평생 동안 연결된 여성'으로 새롭게 정의한 것처럼 말이다. (“단어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아가씨가 항상 말했잖아요. 그러니 ‘여자 노예’는 저 쪽지들에 적혀 있는 걸 넘어서는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아가씨가 어릴 때부터 아가씨와 '연결돼 있는 여자(bondmaid)' 였어요, 에시메이. 그리고 난 그 매일매일이 기뻤어요.” 리지 레스터, 1915년)


 물론 언어(단어)와 그 의미를 바꾼다고 현실이 급작스럽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언어를 들여다봄으로, 우리는 현실을 마주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성찰하고, 반성하고, 변화를 꿈꾼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 정의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언어와 그 의미를 탄생시킬 수 있는 존재다. (물론 언어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착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언어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표현 불가능한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날뛸 수 있기에.) 에즈미는 언어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 내재된 (덜 가시화된) 불평등함을 목격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던 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 이들은 에즈미와 함께 어떤 단어들을 복권하기도 하고, 새로운 단어와 의미를 세우기도 한다. 지금의 우리에게 여전히 요구되는 작업이다.


 단어들로 이루어진 에즈미의 삶을 덧그리며,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에게는 어떤 단어들이 있을까. 어떤 말들을 잊고, 또 잃어버렸을까. 나를 감싸고 있는 단어들은 뭘까. 어떤 단어들이 나를 만들었을까. 나는 어떤 단어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까. 언어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단어들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을까. 당신의 단어들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단어이건 간에, 그 단어가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사전에 실리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로 활동하며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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