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O 리얼밸리 파크 컨퍼런스에서 얻은 커리어에 대한 생각의 조각들
처음으로 일이라는 것을 쉬어본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간다. 고정된 일정이 딱히 없는 요즘, 아이러니하게도 구속과 자유는 때로 결을 같이 하는구나 느끼고 있다. 무한한 선택지가 주어진다는 것은 곧 수많은 질문의 꼬리를 좇아가야 한다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평생 갈망해온 나에게 사실 필요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잘 설계된 구속과 제한이지 않았나 싶다. 이런 뜬구름 잡는 생각의 발걸음을 늦추려 노력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삶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탐구하고, 여러 가지 가설과 이를 뒷받침하는 과거의 데이터를 찾아보고, 어떤 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액션 플랜과 프로젝트 매니징을 구상하는… 마치 지금까지 다양한 조직에서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해왔던 것들을 나에게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 뭐하냐 묻는 사람들에게는 “워니 최적화”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호하던 픽셀의 무리 속 연계성이 점차 보이면서, 인생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경험을 만끽하는 중이다.
이러한 날들을 보내는 와중에, 내가 몸담고 있는 하이아웃풋클럽(HOC) 커뮤니티에서 리얼밸리 파크 컨퍼런스 소개를 접하게 되었다. 홀린 듯 원래 있던 일정을 취소하고 금요일 온종일 성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무언가 마음을 동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오랜만에 ‘커리어’라는 나에게 멀고도 가까운 단어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열정어린 눈망울과 기대 반 책임감 반으로 다소 굳어 있는 어깨로 가득 찬 공간에 다다르니 찬 겨울바람에 얼은 뺨이 금세 녹았다. 나는 한 공간에 있는 모두가 비슷한 꿈을 꾸며 제각기 삶을 살아간다는 걸 느끼는 순간을 좋아한다. 야구 직관이나 락 페스티벌, 시위를 즐기는 것과 같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일종의 동료 의식과 연대감은 언제나 고양감을 준다. 오랜만에 ‘일’로서의 공통점을 가지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 자체로서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들뜬 마음은 종일 계속해서 지속하였다. 단 하나의 세션도 빠지지 않고 모두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리얼밸리 파크에서 만난 연사들의 이야기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뜻밖에 아날로그를 훨씬 선호하는 성격이라 세션을 들으며 노트에 휘갈겼는데, 종이에 펜촉으로 눌러가며 마음에 새기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아 손이 아플 정도였다. 다른 사람에게 얻은 영감으로 나 자신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 다짐하는, 역시 내가 제일 살아있다 느끼는 그 순간이었다.
수많은 어려움과 페널티를 이겨내며 자신의 길을 일구어낸 연사들의 상기된 얼굴에서 자랑스러움이 느껴졌다. 비생산적인 자기 연민이나 쓸 데 없는 잡생각으로 시간을 날리던 날들이 부끄러웠다. 동시에 나 또한 그들과 같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봉우리를 끝내 넘었던 적이 있었음을 상기했다. 제각기 피와 살이 깎는 노력을 통해 얻어낸 성과와 깨달음을 담은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것이 있었다. 성별, 나이, 분야, 전공, 경력이 달라도 결론이 하나로 귀결되는 느낌이었다. 두 줄로 감히 줄여 보자면 아래와 같다.
나 자신을 알고, 스스로 목표를 향해 자신의 속도로 나아가라.
나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같이 성장하라.
스타트업 업계에서 이리저리 함께 굴러 온, 실무자에서 중간관리자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는 미들급 친구들과 만나면 요즘 항상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본인만의 스타일이 강하고 이를 드러내는 것도 서슴지 않는, 고독한 스타플레이어가 팀을 이끄는 주장이 되어야 하는 과정에서 겪는 잡음과 고뇌이다. 한 마디로 “어쨌든 성과는 내가 제일 잘 내는데?”에서 “나 혼자만 잘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구나”로 이어지는 순간을 맞닥뜨린 우리다.
일명 ‘커리어’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쉬이 자신의 니즈에 매몰되어 시야가 때로 좁아지는 경향성이 있다. 나도 그렇다. 하고 싶은 것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그래서 보여줘야 할 것이 있고, 그렇기에 열심히 ‘일’해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비교적 정말 최근까지도 나 자신이 아닌 회사만의 성장을 위해 살아온게 아닌가 생각했다. 회사의 성장을 위해 주어진 KPI와 OKR, 프로젝트 따위를 초과 달성하기 위하여 수많은 낮과 밤을 헌납해왔던 과거를 떠올리면 뿌듯하다가도 씁쓸해지기 일쑤였다.
내 포트폴리오 최상단에 자주 등장하는 올라운더, 제너럴리스트, 잡부와 같은 단어들은 무엇을 내포하는가? 모든 것이 가능하게끔 치열히 살아온 과거에 대한 자부심도 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위임이나 협업 없이도 혼자 잘할 수 있다는 방어적인 태도도 존재한다.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는 것을 마음으로는 잘 알면서도 막상 모니터 앞에 앉아 일에 파묻히면 큰 그림을 잊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일과 한 발짝 떨어져 그때의 ‘나’를 바라보니,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했던 선택임을 깨달았다. 사실은 그 과정을 통해 회사 안에서 성과를 연달아 이루어내며 포지션과 영향력을 굳건히 하는 ‘나’에 얄팍하게도 도취했던 것이다.
그래, 사실은 나의 성장이 곧 우리의, 회사의 성장이지 않나. 왜,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느냐는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궁극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기에, 나 혼자만이 아닌 우리가 모두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두어야만 한다.
스타트업 8년 차에 명함은 다섯 장, 그때그때 관심사와 열정에 끌려 달려오기만 하다 처음으로 온전히! 일을 쉬고 있습니다. 일이라는 것이 단순히 성취할 대상이나 성과를 보여줄 무대가 아닌, 그 이상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효과적 수단으로서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 중에 있습니다. 적 없이 홀로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생각보다 일을 더 좋아하는구나, 심심하고도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곱씹는 중입니다.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내딛어볼까 슬슬 엔진에 기름칠하고 있는 요즘,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새로운 기회와 설레는 낭만이라는 불을 지피는 데에 사람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다면 이번 기회에 커리어라는 주제에만 몰입하는 하루를 가지며 숨 고르기에 마침표를 찍고 싶습니다.
리얼밸리 파크에 참여하기 전, HOC 슬랙에 남겼던 나의 실제 댓글이다. 일이 인생의 거진 80% 이상을 차지했기에 일을 하지 않는 지금이 아직도 생소하다. 남은 20%를 담당했던 그림과 예술이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으리라 막연히 동경했던 것도 무의미함을 안다. 그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는 누구인가? 80%의 나도, 20%의 나도, 그리고 0%의 나도 사실은 모두가 나임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일하지 않아도, 명함이 없어도,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타투를 하지 않아도 나는 나이다. 비었다는 것은 채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기에 수많은 조각을 얻을 수 있었던 나에게 뒤늦은 감사를.
이번 리얼밸리 파크 컨퍼런스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정교하고도 전략적인 규율과 계획이 필요함을 느꼈다. 국내 스타트업을 넘어 더 큰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Every valley has a peak라는 컨퍼런스의 모토처럼, 내가 다음에 넘어볼 꼭짓점은 어딘지를 찾을 것이다. 설령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가다가 새로운 길을 고르더라도, 비탈길에 굴러 넘어지더라도 괜찮다. 그 모든 과정이 있기에 봉우리를 넘는 그 순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업계의 수많은 동료에게, 원대한 꿈을 상상하며 낭만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선택한 모두에게 리얼밸리 파크 컨퍼런스를 추천하고 싶다. 함께 더 멀리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