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신용카드 만들기가 참 쉬웠다. 회사별로 각종 프로모션도 활발해서 신용카드 만들 때마다 캐시백도 솔솔 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카드 회사별로 신용카드를 만들어서 각종 혜택을 알차게 누리기도 했다. 해외에 나오니 상황이 달라다. 신용카드는 말 그대로 신용이 있는 사람에게 발급이 되었다. 은행에 어느 정도 거래내역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연봉이 높아야 한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정 조건을 갖추면 신용카드가 발급되었다. 그동안 지내온 나라들에서는 모두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알차게 혜택을 누리며 사용했었다. 필리핀에 오니 상황이 달랐다. 신용카드 발급의 문턱이 높았다. 필리핀에서는 각종 신용카드 관련 사고도 많이 일어나고 딱히 신용카드가 필요가 없기도 해서 발급을 알아보지도 않았다. 필리핀은 G-cash가 있기 전까지는 현금이 우선시되는 사회였다. 필리핀을 대표하는 간편 결제 서비스인 G-cash는 우리나라의 카카오페이나 페이코와 유사하다. 핸드폰으로 송금 및 대부분의 상점에서 결재가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간편 결제 서비스도 각종 업체들의 경쟁이 활발한데, 필리핀의 경우 G-cash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마야페이나 쇼피페이 등 다른 서비스가 있기는 하지만 G-cash 가맹점이 월등히 많다. 물론 이것도 필리핀 대기업인 글로브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독점한 결과이다. 통신에 금융까지 먹고 무럭무럭 거대 공룡이 되고 있다. 아무리 거대 공룡이 싫어도 G-cash가 편한 건 어쩔 수 없다. G-cash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한 사건으로 인해 바뀌게 되었다.
오랜만에 회식날이었다. 회식장소는 TGIF 한때 패밀리레스토랑의 대표주자였지만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바로 그 레스토랑이 맞다. 필리핀에서 TGIF를 다시 만나니 추억 속의 장소가 반가웠다. 메뉴를 고르려고 하는데, 한 직원이 본인의 신용카드로 무려 50% 할인이 가능하다고 했다. 5%가 아닌 50%. 순간 귀를 의심하고 5%가 아니냐고 물었지만 50%가 맞다고 한다. 필리핀의 신용카드 프로모션은 막강했다. 필리핀에 온 순간부터 필리핀의 불편한 점들이 너무 많이 보였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줄기 밝은 빛이 보였다. 회식을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신용카드를 신청하였다. BDO에도 계좌가 있기는 하지만 주거래 은행이 BPI여서 BPI 카드를 신청하였다. 이후 알게 되었지만, 필리핀의 신용카드는 쉽게 발급되지 않았다. '통장 잔고에 1억이 있어야 된다'. '월급이 천만 원이 넘어야 된다.' 등 각종 루머가 많았다. 그 와중에 딱히 조건에 부합되지 않아도 신용카드가 나온 사람들도 있다. 맞다 필리핀에서는 딱히 정해진 규칙이 없다. 그냥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깐깐한 듯 허술한' 딱 필리핀이다.
처음 며칠은 은행으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서 어느새 내가 신용카드를 신청했다는 것조차 잊을 때였다.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와있었다.
'신청하신 신용카드가 발급되었습니다.'
그런데 발신처가 BDO였다. 불현듯 전에 신용카드를 신청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신청한 은행은 BPI였다. 순간, '이거 스팸이구나.' 생각하고 무시하였다. BDO와 BPI는 같은 계열사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은행이다. 난 BDO에 신용카드를 신청한 기억이 없다. 며칠 후 다시 한번 문자가 왔다.
'신용카드가 발급되어 배송될 예정입니다.'
이번에도 스팸이라 여기고 무시하였다. 다음날 같은 문자가 또 날아왔다. 그제야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BDO 한국데스크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BDO는 한국데스크가 있고 한국인 직원이 응대를 해주어 편했다.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직원은 내 개인 정보를 조회하더니, 신용카드가 발급된 것이 맞다고 하였다.
'이게 웬일인가? 내가 신청하지도 않은 신용카드가 발급되었다니?'
직원에게 이게 가능한 일인지 따지듯이 물었다. 필리핀에서는 가능하다고 했다. 은행 측에서 거래실적이 좋으면 고객에게 묻지도 않고 신용카드를 발급해주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난 거래실적이 거의 없다. BPI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BDO에는 실적이 별로 없다. 게다가 고객에게 의향을 물어보지도 않고 신용카드를 발급한다니. 나는 도저히 지금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다.
직원은 다시 물었다.
"신용카드가 배송되면 사용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나는 얼떨떨한 마음에 대답하였다.
"네, 한번 사용해 보도록 하죠. 참 그런데 신용카드 연회비가 어떻게 되나요?"
"발급하신 첫해에는 연회비가 면제됩니다. 이후에는 월회비로 100페소 우리 돈 2,400원이 청구됩니다."
연회비가 면제된다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용 안 할 이유가 없다. 필리핀에서는 신용카드 회비를 월단위로 받는다. 일 년을 합치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금액이긴 하다. 이제껏 다양한 나라에서 살아왔지만 신용카드 월회비는 처음 들어본다. 하지만 필리핀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다.
이렇게 얼떨결에 신용카드가 발급되었다. 하지만 '산 넘어 산' 또 하나의 고비가 남았다.
'신용카드 배송'
본인이 아니면 받을 수 없고, 대리인이 수령할 경우 위임장과 신분증을 지참하여야 한다. 큰 문제는 신용카드가 언제 배송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수일 내에 배송이 된다고 하는데, 와이프도 나름 일정이 바쁘다 보니 하루종일 집에서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역시나 며칠 후 신용카드 배송이 실패했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심지어 이때는 와이프가 집에서 하루종일 있었을 때였다. BDO 한국데스크에 전화를 했다. 상담원은 다시 배송요청을 할 테니 꼭 집에 있으라고 했다. 배송 전에 전화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 신용카드 배송사고를 막기 위해 봉투에 신용카드라고 적혀있지도 않고 배송원에게 내 전화번호가 전달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도착하면 인터폰을 누르니 인터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한다. 그제야 생각났다. '인터폰' 우리 집에는 인터폰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울리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처음 입주할 때 인터폰 수화기를 귀에 대 본 적이 있다. 아무 소리도 안 났다. 인터폰은 그저 장식품이었다.
'깐깐한 듯 허술하게.'
무언가 시스템이 있는 것 같지만 작동은 안 한다. 딱 필리핀이다. 다들 시스템에 맞추어 무언가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실상 하는 척만 하는 것이 많다.
'나 참, 그러면 어떻게 신용카드를 받으라고?'
며칠 후 혹시나 신용카드가 배송 오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일찌감치 퇴근한 날이었다.
'띵 똥'
낯선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초인종 소리였다. 초인종 역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도 안 했는데, 다행히 초인종은 작동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나 로비에서 매일 인사하는 경비원이 있었다. 참 친절하다. 항상 문 앞에 서서 누군가 들어오면 친절하게 문을 열어준다. 이 분의 본업이 문을 지키는 것인지 문을 여는 것인지 헷갈린다. 여하튼 로비에 택배가 와있는데 내가 꼭 내려가야지 받을 수 있다고 전하였다.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부리나케 슬리퍼를 끌고 로비로 향한다.
배달원이 하얀 봉투를 건넸다. 정말 어디를 봐도 신용카드 배송봉투처럼 보이지 않는 그저 평범한 하얀 봉투를 건넨 후 서명을 받아간다. 봉투를 건네며 배송원도 하소연을 한다. 지난번에 왔을 때 수신자의 연락처가 어디에도 없어서 연락할 수가 없었다. 로비에서는 보안 때문에 콘도 위로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해서 지난번에는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헉'
지난번에 사람이 집에 있었음에도 전달받지 못하고 반송되어 간 것이었다. 이번에는 경비원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경비원이 우리 집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우리 집의 인터폰은 그냥 장식품이다. 보안 때문에 배달원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없고, 연락처가 없는 배달물은 수령할 방법이 없다. 여하튼 배달원의 노력과 경비원의 배려 덕분에 신용카드를 수령할 수 있었다. 카드등록을 마치니 자동으로 BDO은행 앱에 신용카드 계좌가 생성되었다. 와이프와 바로 외출을 하였다. 신용카드가 정상 작동하는지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 물론 필리핀이기 때문에 기대는 반반이었다. 신용카드를 등록했지만 실제로 작동은 안 할 수 도 있었다. 바로 옆의 몰 안에 슈퍼에서 오렌지를 몇 개 산 후 결재를 시도하였다. 다행히 결재가 되었다. 심지어 터치결재다. 싱가포르에서는 일반적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터치결재. 신용카드를 단말기에 가져다 대기만 하면 결재가 성공한다. 이러면 G-cash 보다도 편리하다. G-cash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핸드폰에서 해당 앱을 작동시킨 후 보안인증을 하고 바코드 스캔 메뉴에 들어간 후에 결재가 가능하다. 물론 인터넷 상태에 따라서 이 과정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 반면 신용카드 터치결재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드디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신용카드로 편하게 결재할 수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신용카드 혜택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직 음식점 50% 할인이 계속되고 있었다. 가맹점도 꽤 있었다. 일식, 중식, 양식 등 다양한 레스토랑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이 대부분의 가맹점들이 집 옆의 몰에 있었다. 할인 조건이 있었다. 주말인 금, 토, 일요일 에만 할인이 되고 최소 2,500페소 이상 주문하여야 하고 최대 6,000페소 까지 주문한 금액에 대해 할인이 가능했다. 최소 금액 2,500페소는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소를 키우는지 헷갈리 정도로 많이 먹는 듬직한 두 아들 덕분에 아침 이슬(말 그대로 술이 아닌 이슬)만 먹고사는 와이프와 동행을 해도 가뿐히 최소 금액을 채울 수 있다. 할인 기간은 아직 두 달이 남아있었다. 주말이 되기를 기다렸다. 첫 번째 목표는 TGIF.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아 자랑스럽게 BDO카드를 보여주었다. 직원은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흥분상태에서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첫째가 자연스럽게 핸드폰 계산기를 켠 후 금액을 합산하였다. 가늘고 길게 가자는 마음으로 아쉽지만 2,500페소를 조금 넘기고 합산을 멈춘다. 와이프가 샐러드만 먹기에 가능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고 점심도 있고 저녁도 있다. 먹을 때만큼은 합심해서 대동단결한다. 일사불란하게 메뉴를 분석하고 금액을 합산한다.
이후 우리 가족의 식도락 여행은 몇 주간 계속되었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계속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외식이 슬슬 질려갈 무렵 스테이크 맛집인 '텍사스 로드하우스'가 몰에 오픈하였다. 금요일 퇴근과 동시에 우리 가족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굳은 마음으로 스테이크 집에 도착하였다. 일사불란하게 주문을 마치니 식전빵이 나왔다. 촉촉하고 갓 구운 빵이었다. 다 먹으니 계속 리필해 주었다. 네 번째 빵 바구니를 비울 무렵 스테이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된 스테이크였다. 정말 만족스러웠다. 가격대가 높기는 했지만 우리에게는 BDO 신용카드라는 막강한 무기가 있었다. 스테이크 메뉴 하나에 사이드 디쉬를 두 개씩 고를 수 있었다. 오늘만큼은 와이프도 힘을 내어 스테이크 한 덩어리에 도전하였다. 물론 나중에 절반을 잘라 본인들 몫을 순식간에 해치운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와이프도 꽤 만족해하면 스테이크를 즐겼다. 스테이크 맛에 심취해 있는데 갑자기 직원들이 주변에 둘러 서더니 박수를 치면서 춤을 추기시작했다. 흥겹게 식사를 즐기라고 시간마다 직원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춰준다. 처음에는 얼떨떨했지만 분위기에 젖으니 흥겨웠다.
몇 차례의 식사를 즐기고 난 후 문제를 하나 발견하였다. 신용카드 한도가 25,000페소 우리 돈으로 60만 원이었다. 신용카드를 쓰라고 발급해 준 것인지 쓰지 말라고 발급해 준 것인지 한도가 금방 차버렸다. 한도가 거의 다 차니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한도가 차서 이제 외식을 못할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BDO 은행 앱을 열고 은행계좌에서 신용카드 계좌로 소액 이체를 시도하였다. 이체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한도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제는 기다릴 수 있다. 필리핀에서는 인터넷 이체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길게는 하루나 이틀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한국에서 누리던 즉각적인 처리는 필리핀에서 바랄 수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한도가 복구되었다. 적은 한도도 우리 가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지금껏 사용한 금액을 전부 신용카드에 이체하였다. BDO 신용카드가 무적의 레스토랑 할인카드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다른 레스토랑의 할인 혜택을 알리는 반가운 소식이 종종 날아온다. 필리핀에 불만 갖지 말고 정 붙이고 살라고 하늘에서 신용카드가 내려왔다. 이번 레스토랑 할인 행사가 끝나도 계속해서 다양한 할인 혜택을 제공할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