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2부 _04
아버지는 우리 소식을 알고 있슴까?
그해 겨울, 어머니는 디에에게 웨이를 데리고 타이산(泰山) 근처 친척 집에 다녀오라고 몇 번이나 채근하였다. 마침내 그 둘이 하룻밤 집을 비웠을 때, 어머니는 나와 나누기로 약속한 밀린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부엌 식탁에 마주 앉았다. 어머니에게 아버지 소식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어머니 표정을 보니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 아버지는 우리 소식을 알고 있슴까?”
알고 있다. 모두 알고 있을 거다. 네 아버지는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 세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젠 확신할 수 있다.
나에게 너를 데리고 ‘중국으로 가라’고 처음 말했던 그때 이미, 네 아버진 우리가 이렇게 살게되리란 걸 예측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 결정한 건 네 아버지뿐이다.우린 우리 아닌 것들로부터 결정되며 여기까지 왔다. 그게 너와 나, 우리 두 사람 삶의 대전제다.
아버지가 군인이고 어머니는 교사였지만 예외 없는 ‘미공급’이 4년을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아버지가 팔과 어깨를 다쳐 의병제대를 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공급이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집에 있는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했으며, 퇴원 후 아버지가 장사치들을 따라다니며 중국을 오갔다는 이야기, 곧 마을에 감자를 실은 기차가 도착할 거라는 고통스러운 헛소문, 강냉이와 나무뿌리로 목숨을 연명하던 상상할 수 없는 가난에 대해서도.
그러던 어느 해, 남조선의 큰 ‘기업소’ 회장이 평양에 소를 오백 마리씩 두 번이나 보냈다는 선전과 소가 천 마리나 생겼으니 곧 농촌에 소와 종자가 도착할 테고, 밭을 갈아 농작물이 나오면 ‘공급’이 재개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와 어머니는 잠시나마 희망이라는 것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털에서 황금빛 윤기가 난다는 남조선 소는,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백강에는 한 마리도 도착하지 않았으며, 남조선 소들은 밭을 갈아본 적 없는 것처럼 일을 할 줄 모른다고, 그 튼실하게 생긴 것들이 밭일을 하다가 픽픽 쓰러졌다는 믿을 수 없는 소문만 들려왔다고 어머니는 웃음기 없이 말했다.
희망 후의 절망은 깊은 나락, 이라고 중얼거린 어머니는 어느 날 아버지가 중국에 다녀오며 약간의 쌀과 밀가루 한 봉지, 사과 두 알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 사과를 얼마나 아껴서 먹었었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사과라고 말하며 몇 번이나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떨어질 줄 몰랐었다.
그때, 아버지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여덟 살의 일기장에 ‘참 포근했다’라는 몇 글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날 네가 잠이 든 후, 네 아버지가 나에게 ‘이것’을 내밀며 너를 데리고 중국으로 가자고 말했다.”
어머니가 테이블 위에 꺼내 놓은 것은 중국인 신분증이었다. 한국에서 ‘코팅’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접착보호막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많이 낡은 상태였다.
장만승의 옌지 식당에 공안들이 찾아왔던 날 어머니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떨어뜨린 붉은색 비단 지갑이 불현듯 눈앞을 스쳤다. 지갑 밖으로 튀어나와 언뜻 보였던 바로 그 증서.
성명: 박희옥 朴喜玉, 성별: 여, 민족: 조선 朝鮮, 출생: 1967년 …, 주소: 상하이시 …, 1993년 7월 30일 발급, 유효기간: 20년, 일련번호: …
내가 발급받은 플라스틱 신분증은 이른바 ‘2세대 신분증’이다.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것은 수기 작성된 1세대 종이 신분증. 흑백사진은 희미했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틀림없었고, '조선족'이라 한글과 한자가 같이 써져 있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걸…….”
어머니는 침묵 끝에 ‘오늘은 일단’ 상세한 내막보다 전체적인 ‘력사’를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고 입을 뗐다.
아버지는 장사치들과 중국을 오가면서 옌지 식당의 장만승 사장과 친분을 쌓았으며, ‘퍄오시위’ 신분증은 아버지가 ‘길에서 주운 것’인데 장만승이 사진을 어머니의 사진으로 바꿔주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걸 길에서 주울 수가 있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나에게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 자신도 ‘상세한 내막’을 몰라 얼버무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머니는 루챵과 결혼증을 신청하러 갔던 날을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주웠다는 신분증을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하는 날이었다.
만약 신분증의 ‘주인’이 사망자이거나 이미 재발급을 받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거나 또는 예상할 수 없는 어떤 사연으로 그 자리에서 어머니가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는 북으로 송환될 처지였다고 어머니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결혼증 신청, 그건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어. 밤마다 생각했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세월, 너를 식당에서 채소나 씻고 야시장에서 베개포를 팔면서 살게 할 순 없었다.
학교의 언어를 배우기 전에 시장의 언어에 먼저 익숙해가는 너를 손 놓고 보고 있느니, 한 번 더 내 인생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기야.”
어머니는 기차표를 사고 나서 장만승에게 마지막일지 모를 전화를 해, 혹시 잘못됐을 때 나를 ‘이상한 곳’과 ‘그곳’으로만 보내지 말아 달라고, 학교도 보내지 않고 식당 일만 시켜도 좋다고, 간청했다고 한다.
“장만승 사장, 루챵, 식당 아즈마이들……”
어머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곤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우린……, 숨 쉬며 살아있는 모든 순간 그들을 속이고 있다.”
들썩이는 어깨와 잠긴 목소리를 어머니가 한참이나 진정해야 했던 걸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도망갈 생각은 아예 없다는 듯, 농사짓고 살림만 잘 꾸려가면 되는 농장 아낙의 삶.
결혼증 신청과 웨이의 출생등록 이후엔 딱히 신분증을 사용할 일이 없었다고, 아니 당신이 치열하게 피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견딜 수 있을만큼 참다가 움직일 수 없었을 때에서야 동네 중의사를 불러서 웨이를 낳았고, 그에게 침 몇 번 맞고 탕약 몇 번 지어먹은 것 외에, 본인의 진료를 위해서는 시내 병원조차 간 적이 없으며, 두 아이의 건강검진이나 예방접종을 위해 병원에 갔을 때도 늘 디에가 직접 접수증을 끊게 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돈 관리를 어머니에게 맡기겠다는 루챵에게 그러지 말아 달라며 그저 생활비만 충분히 주면 바가지를 긁지 않겠다는 농담으로 말렸다고, 어머니는 꽤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직접 은행에 가야 하는 일도 피한 것이다.
어머니는, 몇 년 후엔 1세대 신분증을 완전히 2세대 신분증으로 교체해야한다는 통보가 신경이 좀 쓰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분증의 진짜 주인이나 그 주변인이 아무런 신고도 신청도 하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기관에서 별다른 조치가 없는 것 아니겠냐고, 제법 배포 있는 태도로 말했다.
“어쨌든 내 딸을 학교에 못 보낼까 봐 밤잠 설치는 일도 없으니, 제 발로 찾아가 신분증을 갱신할 각오까진 하지 않아도 상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