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강물을 건너온 소녀 2부 _07
내 딸 내를 닮았지
웨이가 소학교 4학년 진학을 앞둔 생일에 컴퓨터를 사달라고 조르고 졸라, 드디어 거실에 PC가 들어왔다. 웨이가 자기 방에 놓겠다고 떼를 썼지만 디에는 가족 모두 함께 사용해야 한다며 거실에 놓았다. 자기 생일 선물인데 가족들이 다 같이 쓰느냐며, 웨이는 잠시 뾰로통했지만 이내 헤헤거렸다.
웨이에게 비싼 선물을 해준 것이 신경 쓰였는지 디에는 내 손에도 선물을 들려주었다. 한국 배우가 광고하는 최신형 스마트폰이었다.
여덟 살 때 고모가 사준 한국 공책 이후, ‘사물’에 가슴이 뛰어본 건 처음이다. 마치 절규하는 그림처럼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싼 채 입을 다물지 못하자, 디에는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사달라는 소리도 한 번 안 했다’며 혀를 끌끌 찼다.
세화와 링링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TV에서 본 것처럼 휴대폰을 멀찍이 들어 내 얼굴도 사진으로 찍어봤다. 집과 마당, 농장 곳곳을 찍고, 웨이와 디에의 얼굴도 찍었다. 그리고 어머니.
농장 나무 아래 서 있는 어머니, 부엌에서 사과를 자르는 어머니, 거실 소파에 앉아있다가 날 쳐다보며 웃는 어머니. 마당 햇살 아래서 빨래를 널고 있는 어머니.
멀리서 한 장 찍고 다가가서, 내 얼굴을 어머니 얼굴 곁에 놓고 함께 찍었다. 사진을 넘겨보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우리 정말 많이 닮았슴다. 기렇지요?”
“기렇지. 내 딸 내를 닮았지.”
어머니는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도 인화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도 잘 몰라 세화에게 메시지로 물어보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우리 가족사진 찍자.”고 말했다.
*
고3을 눈앞에 둔 어느 늦여름 저녁, 어머니가 나에게 식탁을 맡기고 나가더니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어머니 없이 셋만 있던 적이 없었다.
디에와 내가 서로 자기가 나가서 찾아보겠다고 다투자, 웨이가 컴퓨터를 하며 혼자 있을 수 있으니 둘이 같이 다녀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디에와 나는 커다란 손전등을 하나씩 들고 농장으로 들어갔다.
걸을 때마다 잔 돌가루를 밟는 자그락 자그락 소리가 들렸다. 한여름밤 공중에 떠 있는 가벼운 진공의 소리, 간간히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의 소리, 물결처럼 퍼져오는 유행가의 메아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기울어지는 디에의 발자국 소리, 뭔가 조심스러운 내 심장 소리, 손전등을 향해 달려드는 곤충들의 날갯짓 소리.
이 소리들 너머 어둠 속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디에와 난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디에가 손전등을 껐다. 나도 따라 손전등을 껐다.
그리곤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눈앞의 깊은 어둠 속에 어머니가 보이자 디에와 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어둠에 어느새 익숙해진 터라, 멀찍이 희미한 벌레 유인등 빛만으로 어머니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어머니는 담장 근처의 커다란 버드나무 곁에 쪼그려 앉아 한 손으론 둥치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가슴 한가운데를 퍽퍽 치며, 소리를 억누르면서 울고 있었다.
디에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디에와 난 농장 입구를 향해 되돌아 걸었다.
잔 돌가루가 밟히는 자그락 자그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여름밤 공중에 매달린 진공 같은 소음도, 내 심장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엔 침묵의 소란만 가득했다.
농장 입구가 보이자 디에가 걸음을 멈추며 “여기서 기다리자.”라고 말했다.
디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보고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내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러곤 굳은살 박인 두꺼운 손으로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한참 서 있으려니 멀리서 어머니가 걸어왔다. 어머니는 입구에 서 있는 디에와 나를 보고 멈칫하더니 양 볼을 슥슥 닦고는 씩씩하게 걸어왔다.
씩씩하게 걸어왔지만 내 얼굴을 보더니 결국 다시 눈물이 터졌다. 디에는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있잖아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그 말을 듣고 어머니 얼굴에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나무 둥치에 기대어 가슴을 치며 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바로 그 순간, 디에도 알았던 것이다. 내가 직감한 것과 똑같은 것을.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디에는 ‘내 아버지’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던 거다.
어머니의 구석에 한 그루 버드나무가 서 있던 것처럼 디에의 어딘가에도 진짜 샤오옌과 샤오옌의 어머니가 서 있을 것이기에.
그날은 어머니가 내 아버지 리진철이 그해 늦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장만승에게 전해 들은 날이었다.